Posted
Filed under 일기장

6.

이듬해 1월. 교토의 콘서트홀에서 오사카 대학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의 제88회 정기 연주회가 열렸다. 이들이 연주한 곡은 슈만의 ‘만프레드 서곡’, 차이코프스키의 ‘로미오와 줄리엣 환상곡’, 그리고 브람스의 ‘교향곡 제2번’이었다. 나는 이때 연주자가 아닌 스태프로 참가하여, 로비의 데스크를 지키며 연주회장을 찾은 관객들이 연주자들 앞으로 보내는 선물을 위탁받는 일을 했다. 연주회가 중반을 넘어가면 어차피 할 일이 없는 역할이라, 나는 로비 안에 울려 퍼지는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들었다. 브람스 2번 4악장의 격정적인 피날레가 끝나고, 사람들의 박수갈채가 교토 콘서트홀을 가득 채웠다. 나 역시 로비에서 그들에게 마음속으로 박수를 보냈다. 연주회가 끝난 뒤 대기실에 돌아가니 여기 저기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번에는 그 눈물을 비웃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아직 그 눈물의 의미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나는 더욱 연습에 매진했다. 3월 초, 89회 정기 연주회를 넉 달 정도 남기고 아미야로부터 한 통의 문자 메시지가 왔다. 서곡의 제2 바이올린 파트로 들어와 주지 않겠느냐고, 아미야 다운 매우 정중한 어조로 쓰인 글이었다. 초대의 형식을 하고 있었지만, 이것은 연주회에 설 수 있다는 ‘승낙’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이 정중한 글에는 그러나, “힘들게 연습 시킬 것이니 각오 하고 대답을 주십시오.”라는 경고도 포함되어 있었다.

“도저히 못 따라간다 싶으면 쫓아내도 좋으니, 같이 하고 싶습니다. 물론 쫓겨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명실공이 한 명의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었다. 연주회를 준비하는 네 달의 기간은 결코 신나지만은 않았다. 네 달 동안 단 한곡의 곡을 붙잡고 있는 것은 대단한 인내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그 네 달의 시간을 온전히 쏟아 부어도 한 곡을 제대로 연주하기 힘들만큼, 나의 기초가 부족한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120일간 하루 평균 세 시간씩 연습했는데, 악기를 잡지 않은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매주 주말에 있던 전체 연습은 한두 번 빠진 일이 있었지만, 매주 목요일 저녁 파트 연습은 한 번도 빼먹지 않았다. 물론 바이올린 레슨도 계속 받았다.

2007년 7월 7일. 행운의 숫자 7이 세 번 겹쳤다 하여 길일이라던 그 날, 오사카 대학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의 제89회 정기 연주회가 열렸다. 연주회의 문을 연 곡은 바그너의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의 서곡. 아마가사키 홀에서 천 명의 관객을 앞에 두고, 또 천 명의 관객 중 한 사람, 백 명의 오케스트라 단원 중 한 명의 나를 보기 위해 찾아와 준 친구를 두고, 나는 이 곡을 연주했다. 연주 시간은 10분 남짓. 그 10분 남짓의 연주를 위해 나는 300시간 이상을 연습했다. 아니 어쩌면 그 10분을 경험하기 위해 나는 일본에 갔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연주가 끝났을 때, 나는 굳이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노력의 한 걸음을 내딛어야만 했던 이유를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케스트라 단원. 실현 불가능한 공상으로 치부했던 것이 현실이 되어버렸다.

다음 달, 바이올린 파트의 동료들이 나를 위한 환송회를 열어주었다. 그렇게 내 유학 생활은 마감되었다. 동료들은 오사카 대학 오케스트라에서 연주 생활을 이어가게 될 터였지만, 내 경우는 미래가 불투명했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오케스트라 활동을 지속해 나가겠다는 의지만은 확고했다. 그때 오랫동안 기억의 저편에 잠들어있던 이름이 떠올랐다. 바이올린 시작한지 한 달 남짓인 나의 상상력을 자극했던 이름, 연세대학교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유포니아. 새로운 길은 의외로 빨리 발견될 것 같았다.

7.

2007년 8월 20일. 나는 1년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다. 대부분의 짐은 배편으로 미리 부쳤으므로, 산더미 같은 짐을 들고 돌아오지는 않았다. 어깨에는 바이올린 케이스를 짊어지고 있었다. 나는 자신만만했다. 1년 동안 실력이 조금 향상된 것에 우쭐한 면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떤 일에도 도전할 용기가 있고, 어떤 힘든 길도 걸어갈 성실함과 인내심이 있다고 믿었기에 자신감이 있었다.

거의 2년 만에 돌아간 학교는 완전히 낯선 공간이 되어 있었다. 나는 벌써 3학년생이 되어있었지만, 기분은 흡사 새로 대학 생활을 시작하는 것 같았다. 개강 직후, 유포니아 동아리 방을 찾았다. 오사카 대학 오케스트라의 문을 처음 두드릴 때만큼의 각오는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오케스트라를 찾아 발걸음을 옮겼던 것이다.

유포니아의 동아리 방은, 채플을 들으러 다니던 대강당 1층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처음 찾아갔을 때, 나는 그게 오케스트라 동아리의 방이라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오사카 대학 오케스트라는 비록 주말이면 전체 연습 할 공간을 찾아 시내 여기저기의 홀들을 전전해야 하긴 했어도 학교 안에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상시 연습할 수 있는 커다란 공간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는 거의 1년 내내 누군가가 악기 연습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유포니아의 동아리방은 너무 비좁아 열 사람만 들어가도 가득 찰 것 같았다. 푹신푹신한 소파와 컴퓨터가 갖추어져 있었지만, 그 안에서 악기 연습을 할 수는 없어 보였다. 마침 동아리 방에 단원들이 몇 명 있어서 나는 입단 절차를 물어보다가 슬그머니 연습 장소에 대한 것도 물어보았다. 혹시 따로 연습할 공간이 있느냐고. 그러자 그 대답이 걸작이었다. 평소에 개인 연습은 대강당 양 옆의 복도에서 한다는 것이었다. 복도에서 연습을? 오케스트라마다 여건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다는 것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며칠 후, 나는 유포니아의 정기 연주회를 관람하러 갔다. 서곡은 공교롭게도 내가 처음 관람한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연주회의 서곡이었던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이었다. 두 번째 곡은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이었는데,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협주곡을 연주한다는 것도 나에게는 신기하게 느껴졌다. 메인 곡은 드보르작의 교향곡 8번이었다.

단원들이 개인 연습을 할 변변한 공간도 갖지 못한 오케스트라가 어떤 연주를 들려줄지 궁금했다. 오사카 대학 오케스트라는 일본의 대학가 아마추어 오케스트라들 중에서도 실력이 좋기로 평판이 나있다. 도쿄대나 교토대처럼 엄격한 기준으로 단원들을 선발하는 입단 절차 같은 것이 없으면서도 ‘되는 대로’ 받은 신입들로 그처럼 높은 수준을 유지하는 것은, 그만큼 개개인들이 실력을 연마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단원들이 언제나 자유롭게 개인 연습을 할 수 있는 ‘학관’의 존재야 말로 그 여건의 핵심일 터였다. 오사카 대학 오케스트라 선배 중에 건축을 전공한 사람이 있었는데, 연주회 후 연설 때 자신은 마음속에 늘 학관과 같은 장소를 품고 앞으로 건축 설계를 해 나가고 싶다고 했다. 물론 학관과 같은 난잡한 장소를 설계의 모델로 잡으면 낭패겠지만, ‘정이 깃드는 공간’, ‘마음이 편안해지는 공간’이라는 의미에서 건축의 철학을 얘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게도 학관은 의미가 큰 장소였다. 학교를 떠나기 전 아쉬운 마음에 마지막으로 학관을 들러 구석구석 찬찬히 살펴보았던 기억이 있다. 수업이 끝나면 늘 찾아갔던 장소. 사람들이 열심히 연습하는 모습에 나도 자극을 받을 수 있었던 이상적인 공간. 어쩌면 오케스트라를 생각할 때 무대보다도 더 기억에 남고 소중하게 여겨지는 장소일 것이다. 그런 장소의 부재는, 나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유포니아의 연주는 훌륭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악기를 시작한 지 2년. 클래식 음악을 들은 기간도 그 정도. 연주의 질을 논할 만큼의 안목이 생겼다고는 아직 자부할 수 없었지만, 2년 전 그저 무심히 연주를 바라보아야 했을 때와 비교하면 확실히 무언가 다른 바가 있었다. 이날 유포니아의 연주는 나의 기를 죽이기에 충분했다. 오케스트라마다 문화가 다른 것이겠지. 아마도 유포니아는 처음부터 연주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만을 뽑기 때문에, 개인들이 마음 놓고 연습할 수 있는 공간이 없는 상황에서도 이 정도의 연주를 해내는 모양이로구나.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입단 지원서를 제출했다. 이미 적지 않은 나이. 그러나 나이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실력. 유포니아는 2년 전의 내게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저 공상의 대상일 뿐일까. 그러나 나는 그것을 직접 확인 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오케스트라 동아리가 오디션을 통해 신입을 선발하는 것은 어쩌면 꼭 필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디션이 없는, 그러면서도 성공적인 운영을 하고 있는 오케스트라를 먼저 경험한 나에게는, 이 오디션의 존재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오디션을 통한 선발은 실력 있는 단원의 유입을 담보하긴 하지만, 반드시 열정과 의지가 있는 단원의 유입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오사카 대학 오케스트라 생활을 하면서 느낀 것은, 실력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오사카 대학 오케스트라와 유포니아의 문화와 전통이 엄연히 다른 만큼, 상황에 맞게 대처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오디션은 미리 준비한 자유곡 1곡, 즉석에서 공개되는 초견곡 1곡의 연주를 통해 연주력을 검증하는 단계와 면접관들과의 질의응답을 통해 지원자의 성격을 파악하는 구술 면접의 단계로 구성되어 있었다. 나는 자유곡으로 파가니니의 기타와 바이올린을 위한 이중주곡 중에서 쉬운 악장 하나를 골랐다. 원래 친구와 합주를 하려고 찾은 곡인데, 덜 알려져 신선하면서 어렵지 않은 곡이라 괜찮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최악의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

오디션을 본 후 며칠이 지나 유포니아 사람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죄송합니다만 바이올린 파트에는 불합격 하셨습니다. 대신 호른을 불어볼 의향은 없으신가요?”

오디션의 벽. 그것은 불과 얼마 전까지 대학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의 단원이었던 내가 다시 오케스트라 생활을 그저 공상으로 여기게끔 만들기에 충분하리만큼 높은 것이었다. 다른 악기를 선택한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제의는 감사합니다. 그러나 호른은 제게 맞는 악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유포니아와는 인연이 없는 것 같군요. 아쉽습니다.”

8.

2007년 10월부터 나는 신촌에 있는 음악 학원에 등록하여 바이올린 레슨을 재개했다. 일본 시절부터 쉬지 않고 달려와 들끓은 열정은 쉽게 식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다시 고독한 연습을 시작했다. 수업이 끝나면 늘 학원을 찾아가 하루 두 시간 정도 연습을 했다. 유포니아와 인연이 없는 것 같다고 한 말은 진심이었다. 당시의 내 학년과 실력을 고려할 때, 또 다시 유포니아의 문을 두드린다는 것은 어려울 것 같았다. 오케스트라에 대한 나의 애정과 의지와 성실함과 진지함이 실력의 한계 앞에 평가 받지 못 한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분하기도 했다.

다시 1년. 뚜렷한 목표도 없지만, 10년 동안 레슨을 중단하지 않겠다는 약속만은 지키기 위해, 그리고 언젠가 어떤 식으로 만나게 될지 모르는 오케스트라 입단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나는 연습을 포기하지 않았다.

1년이 지나 2008년 가을 학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학기 시작과 함께 조기 졸업 신청을 위해 학적과 사무실을 찾았다. 조기 졸업을 위해 나는 닥치는 대로 전공 수업을 들었고, 방학에도 계절 학기를 들었다. 덕분에 4점대 이상이었던 학점은 3점대로 주저앉았지만, 그래도 조기 졸업 가능 학점은 유지하면서 3학기 만에 필요한 전공 학점을 모두 이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졸업 요건에 고급 과목을 몇 학점 이상 이수해야 한다는 제한에 걸렸다. 불과 6학점이 부족해, 나는 조기 졸업을 할 수 없었다. 그 말은 곧 대학을 한 학기 더 다녀야 한다는 것이었다. 졸지에 남은 학교생활이 반년에서 1년으로 늘어났다.

며칠 후, 나는 유포니아에 다시 입단 지원서를 냈다. 어쩌면 이런 것이 내가 생각했던 ‘언제 나를 찾아올지 모르는 기회’가 아닌가 싶기도 했다. 주위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심지어 레슨 선생님에게도 비밀로 하고, 오디션 준비를 했다. 스즈키 교재에 수록된 헨델의 바이올린 소나타 중 한 악장을 골라 악보를 복사하고, 문구점에서 검은색 색지와 풀을 사서 정성스럽게 악보를 정리했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이며 마지막 시도였다.

며칠 후 합격 통보 전화를 받았다.

[다음에 계속]

2010/04/05 06:00 2010/04/05 06:00
Posted
Filed under 일기장

4.

일본 입국 첫 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무거운 짐들은 공항 안의 택배 회사를 찾아 당일 배송 서비스로 부치고, 기숙사 주소와 약도가 그려진 안내장 한 장과 바이올린을 들고 공항을 빠져나왔다. 공항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가서는 대담하게 택시를 탔다. 일본어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오랜만에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일본어의 억양에는 아무래도 어색한 구석이 있었다. 얼마 후 당도한 오사카 대학의 국제학생 기숙사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허름한 건물이어서 첫 인상은 적잖이 실망스러웠다. 관리실로 들어가 일본어로 내 소개를 하려는데, 상대방이 갑자기 한국어로 말을 걸어왔다. 국제학생 기숙사인 만큼 관리실을 지키는 사람들도 유학생들인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108호 A. 내가 1년 동안 생활하게 될 방으로 안내되었다. 좁은 방 안에 책상, 책꽂이, 옷장, 냉장고, 침대, 에어컨 등 시설이 빼곡히 갖추어져 있었지만 그래도 허전해 보였다. 관리인이 돌아가고, 나는 침대에 홀로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외국에서 홀로 시작하는 유학생활. 내가 바랐던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건만, 가슴 한 구석에서 피어오르는 불안감은 억누를 길이 없었다.

며칠 후, 오사카 대학에서 나의 지도 교수로 지정된 교수와 면담을 하게 되었다. 이때 처음으로 내가 1년 동안 공부할 캠퍼스에 가 보았다. 그리 길지 않은 면담을 끝내고, 나는 캠퍼스 안을 산책하며 둘러보았다. 그런데 어디선가 금관악기의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보았다. 소리의 근원에 다가갈수록, 금관악기뿐만 아니라 목관악기, 현악기 등 다양한 악기의 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끄러운 소음은 어떤 허름한 건물의 1층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입구의 유리문에는 “초심자도 환영. 사양하지 말고 들어오세요.”라고 적힌 빛바랜 종이가 붙어있었다. 그곳은 오사카 대학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의 연습실이었던 것이다.

10월. 학기가 시작되었다. 간혹 한국인 유학생 선배와 이야기할 기회가 생기면, 조심스럽게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보았다. 보통 그런 것에는 무심한 사람들이어서, ‘항상 시끄럽다’거나 ‘조금 소리가 들을만해지면 또 신입생들이 들어와 시끄럽다’란 얘기들뿐이었다. 10월 6일. 아마도 그날은 추석이었을 것이다. 나는 무작정 오케스트라 연습실을 찾아갔다. 문을 열려는데, 마침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한 사람이 너무나 멋지게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어서 순간 망설였다. 그러나 한 번 더 심호흡을 하고, 당당하게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바이올린을 연습하고 있던 그 사람에게 다가가, 혹시 입단 신청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가 악기를 내려놓고 물었다. “무슨 악기로 지원하시려고요?”

“바이올린이요.”

온통 어지러운 연습실 안에는, 대충 책꽂이라든가 책상 따위로 각 파트의 구역을 나눠놓고 있었다. 나는 바이올린 구역으로 안내되었다. 즉석에서 일종의 입단 테스트가 치러졌다. 입단 테스트라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오케스트라는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 식이어서, 연주를 못 한다고 입단을 거부당하는 일은 없었다. 단지 내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가늠해 보려는 것이었다. 한 단원이 내게 악기를 빌려주고, 단지 1년 정도 바이올린을 배웠다는 나의 말을 참고해 적당히 쉬운 곡들이 실린 악보집 하나를 건네줬다. 그 안에서 나는 일본으로 떠나오기 전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레슨 받았던 곡을 찾아내어 연주했다.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한동안 얼굴이 화끈거려 좀처럼 고개를 똑바로 들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나는 단원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날 나는 추석날 밤의 보름달이 뽐내는 아름다운 달빛을 흐뭇하게 즐기며 기숙사로 돌아갔다. 추석을 맞아 한밤중에 한국인들끼리 모여 연 가벼운 주연(酒宴)에서, 나는 내가 오케스트라에 들어가게 되었음을 밝혔고, 사람들의 성화에 바이올린을 꺼내 또 얼토당토않은 연주 실력을 피로했다. 그렇게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나의 대학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생활이 시작되었다.

5.

입단 둘째 날, 나는 악기를 들고 연습실로 찾아가 정식으로 입단 원서를 작성했다. 바이올린 파트 사람들과 인사도 나눴다. 그러나 내 악기 지판에 붙어있는 운지 테이프가 부끄러워, 나는 이 날은 끝끝내 악기를 꺼내보지 못 했다. 눈치껏 살펴보았으나 지판에 테이프를 붙여놓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날 나는 기숙사로 돌아가 지판의 테이프를 떼어버렸다. 그리고 음정을 잡아보려 했지만, 항상 눈으로 손 짚을 자리를 확인하던 습관 때문에 영 어색하고 음정이 정확하지가 않았다. 무작정 오케스트라에 지원은 했지만, 점점 마음은 초조해져만 가고 있었다.

2학기 신입 모집은 거의 하지 않는 일본의 동아리. 여름 방학이 지나 오케스트라에 들어온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환영식 같은 것도 물론 없었고, 동아리 안에 아는 사람 하나 없었다. 내가 단원이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케 해주는 것은, 3000엔의 단원 회비와 얼마 후 떠나게 될 합숙 훈련비를 내야한다는 회계의 전달 사항뿐이었다. 나는 아주 고독하게 오케스트라 생활을 시작했다. 수업이 끝나면 연습실로 가서 보면대 위에 악보를 펼쳐놓고, 저녁 8시 학관이 문을 닫을 때까지 연습을 했다. 주로 호만이나 스즈키 교재에 실린 것들을 지루하게 반복해서 연주했다. 며칠 후 ‘아미야’란 단원이 내게 악보를 건넸다. 합숙 훈련을 가면, 오케스트라 1년차들끼리 모여 연주할 곡이라고 했다. 생각이 있으면 연주에 참여하지 않겠느냐고. 나는 앞뒤 잴 것 없이 일단 ‘예스’라고 답해버렸다. 그리고 살펴본 악보는, 내 수준에서 도저히 연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악보는 베토벤의 ‘피델리오 서곡’ 제2 바이올린 파트보였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비로소 오케스트라 단원으로서의 첫 걸음을 내딛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11월 초, 오사카 대학의 축제가 한창일 때, 오케스트라는 정기 연주회 대비 합숙 훈련을 떠났다. 오사카 대학 오케스트라는 합숙 훈련을 본격적인 연습의 시발점으로 본다. 물론 실력 미달의 신입 단원인 나는, 정기 연주회 참여 대상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견습 단원이라고 할까. 합숙 때 나는 비로소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소개되었고, 저녁 술자리에서 드디어 나보다 나이 어린 사람에게도 사용을 고집하던 경어(존댓말)를 버렸다.

합숙 훈련 중에 나는 처음으로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연습 과정을 지켜보았다. 11월의 쌀쌀한 날씨였지만, 널찍한 방안의 냉랭한 공기도 단원들이 연습만 시작하면 금방 달아올랐다. 현과 목관과 금관과 타악기가 때로는 각자, 때로는 함께 소리를 낸다. 뭔가 어그러지고 맞지 않는 느낌이 들 때도 많았지만, 어느 순간엔가 하나의 소리로 모아진다. 음악 감상의 경력도, 연주 경력도 짧은 내게 그 모습은 하나의 경이였다.

실력 미달의 신입인 나는 아직 정기 연주회에 참여할 수 없어, 몇 명의 다른 초심자들과 함께 ‘피델리오’ 연습에 매진했다. 이 연주는 오케스트라 1년차들이 모여서 합숙 기간에 한 번 재미로 연주해 보는 의미밖에는 없는 것이었지만, 나로서는 다른 사람들과 생애 처음으로 앙상블을 맞추는 소중한 첫 경험이었다.

아미야는 성심껏 지도를 해주었지만, 실력의 한계를 그토록 짧은 시간에 극복할 수는 없었다. 나는 음악을 연주하면서 리듬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 처음 깨쳤다. 혼자서 연습할 때 늘 신경을 써야 했던 것은 음정이었다. 그러나 앙상블을 맞출 때는 리듬을 틀리지 않는 것이 훨씬 중요했다. 머리로는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믿었던 16분 음표와 4분 음표, 온음표의 음가, 그리고 부점이나 트릴, 꾸밈음의 음가에 대한 이해와 정립은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몸으로 익혀야만 했다. 모든 것이 너무 어려웠다. 어려운 부분에서 느려지지 않기, 쉬운 부분에서 빨라지지 않기, 여린 부분에서 크게 연주하지 않기, 포르테에서 작게 연주하지 않기, 쉼표 잘 지키기 등 평소 내가 악기를 연습하며 등한히 했던 모든 것 하나하나가 음악을 만들어 나감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것들이었는지를 ‘혼나며’ 배워야 했다. 그러나 이것도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

합숙 훈련에서 돌아온 후, 나는 바로 레슨을 다시 받기 시작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발견한 음악 학원에 찾아가 상담을 받고, 레슨을 견학한 뒤 바로 등록을 했다. 수업이 끝나면 잠깐 도서관에 들렀다가 늘 오케스트라 연습실을 찾았고, 거의 매일 저녁 8시 문을 닫을 때까지 연습을 했다. 마침 귀갓길 방향이 같았던 ‘고토’와는 매일 함께 하교를 하다 보니 제법 친해졌다. 더군다나 고토와는 바이올린 초보의 애환도 공유하고 있었다. 레슨 받으면서 느끼는 고충과 늘지 않는 실력에 대한 불안감에 대해서도 이야기 나눌 수 있었던 것이다. 이 해의 겨울을, 오케스트라에 대해 막 피어나기 시작한 열정으로, 타지(他地)에서도 외롭지 않게 이겨낼 수 있었다.

[다음에 계속]

2010/03/29 06:00 2010/03/29 0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