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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한 살이라도 나이가 많은 사람 중에 훌륭한 인생을 살지 않은 사람이 없다. 자기보다 열 살 어린 사람 앞에서 현인(賢人)이 아닌 사람도 없다. 아마도 이 세상에서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사람은 나 하나뿐인 것 같다. 내가 중학생 때 읊조릴 수 있었던 주문을, 사람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외우고 있다. 나는 이미 믿음을 잃었기에 사람들의 지리멸렬한 훈계에 대해 귀를 닫고 나의 황폐한 삶을 끌어안은 채 은거하기로 했다.

대낮에 태양으로부터 도망칠 방법은 없지만, 태양을 등지는 것은 간단하지. 결국 마음속 동굴이 우주에서 가장 후미진 곳이다. 한 줄기 빛조차 들지 않는 그 동굴 속에서 차갑고 쓸쓸한 내면을 관조하는 칩거의 생활에는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도 무의미하지만, 그래도 나는 세상의 관습에 따라 동굴 벽에 하루하루를 새겼다. 혹시 나의 달력에는 오류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 동굴 속 생활은 어쩌면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길었을 수도 있고, 혹은 아주 짧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헤아린 시간에 오류가 있다 하여도 그걸 바로잡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어차피 내가 느낀 시간이, 내가 살아온 시간이다.

한 번 자고 일어나면 하루가 지났다고 생각했다. 어떤 때는 하루에 두 번을 잤을 수도 있고, 어떤 때는 이틀에 한 번 잤을 수도 있다. 일주일이나 한 달 같은 시간의 단위는 의미가 없다. 하지만 이 동굴 속에도 1년이란 시간의 주기는 존재했다. 그것은 희미한 빛이다. 어떤 우주의 조화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꿈쩍도 않고 있어도, 어느 순간엔가 동굴 입구에서부터 희미한 빛줄기가 들어오는 일이 있다. 태양의 잔광인지 아니면 또 다른 별의 흔적인지, 어쩌면 그것은 반딧불 같은 작은 불빛이 스쳐지나가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우연에 의한 것이든 아니면 필연에 의한 것이든 그 조광(照光)은 내 마음 속 동굴로 뚫고 들어오는, 외부로부터의 유일한 침범이었다. 어떤 때는 1년이 700일 만에 돌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 날수를 제대로 헤아렸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

다섯 번의 조우, 나의 셈법에 따라 5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동굴 속 인간은 새로운 신화를 창작했다. 그것은 나의 삶을 들쳐볼 수 있는 눈을 가진 그대. 나는 당신과 다른 삶을 살기 위해, 세상과 달라지기로 했다. 그것이 나를 특별한, ‘읽을 가치가 있는’ 인간으로 만들어 줄 테니까. 앞으로 몇 년 후가 될지 알 수 없지만, 내가 이 동굴을 비우게 될 때에, 벽에 빼곡히 적힌 글들은 너에게 남겨주겠다. 그것은 낭비되고 잘못 사용된, 그러나 겸허하고 진실 된 인생의 기록이 될 것이다.

깊고 어두우며 적막한 동굴에, 빛을 들고 찾아올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너를, 나는 상상했다.

2011/05/30 22:25 2011/05/30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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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마약 중독자들이 마약으로 인하여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음을 알지만, 역설적이게도 약쟁이에게는 약에 취해있는 동안만이 유일하게 살아있는 순간이다. 모든 것이 허물어져버린 세계에서, 머릿속에서 폭탄이 터지는 것과 같은 쾌락을 맛보고, 모든 감각을 뒤덮어버리는 지극한 환희를 느끼는 것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궁극적인 ‘생(生)의 증거’일지도 모른다. 누군지는 잊었지만, 어떤 유명인 혹은 소설 속의 주인공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섹스를 해.”라고.

그러나 포식자가 되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뱃속에 집어넣는 것이 삶의 본질을 깨닫게 해 주는 충족의 행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한 마리 양이 되어, 늑대의 날카로운 이빨에 살점이 뜯겨나가고 뼈가 으스러질 때에, 그 처절한 고통 속에서 비로소 살아있다는 것이 대체 무얼 의미하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살아있다! 대체 생의 증거를 찾아 헤매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아침마다 피로와 싸워 눈을 뜨고, 두 다리로 온몸의 무게를 느끼면서 터벅터벅 걸으며, 힘겹게 숨을 쉬는 그 자체보다 더 신물 나고 지긋지긋한 삶의 증거가 어디 있단 말인가? 살아있다고 하는 그 자체가, 지겨운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사는 게 재미가 없다. 현재 한국인의 평균 수명을 생각하면 나는 앞으로 60년 정도를 더 살아야 하고, 의학 기술이 지금처럼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한다면 어쩌면 100년 정도를 더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내가 살아가야 할 그 긴 시간을 생각하면, 때로는 절망감마저 느낄 지경이다.

내겐 음악이 때로 마약과 같은 역할을 한다. 음악을 들을 때면, 작곡가들이 현실에 대해 품었던 강한 불만족 같은 것을 느낀다. 그들은 단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고, 자연이 허락한 이상의 것을 꿈꿨던 것이다. 실체가 없는 음악 안에서는 여전히 하늘로 닿으려는 탑을 쌓고 있다. 그 환상을 보며, 나는 잠시 살아있음을 잊는다.

사무실의 일에는 아무런 흥미를 느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언제 어디에서나 지금과 비슷한 일을 하며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이 세상은 뒤죽박죽 뒤엉킨 거미줄 같은 것이고, 우리들은 그 위에 곤충의 시체처럼 내걸려 있다. 포식자의 뒷다리가 움찔거릴 때마다 우리의 삶은 요동친다. 잔바람에도 전 존재가 휩쓸려가 버릴 것만 같은 위태로움을 느끼며, 그러나 이 고착된 삶의 형태로부터 벗어나기는커녕, 도태되는 것조차 그리 쉽게 되지는 않는 일임을 서글퍼한다. 우리는 그렇게 사회라고 하는 것에 거추장스럽게 들러붙어 있다.

연주회장으로 들어선다. 그러나 무대 위에서, 나는 내가 잊어버리고 싶었던 그 지긋지긋한 현실에 똑같이 구속받는 사람들을 본다. 내가 시시한 문서 작성을 위해 타이핑하듯 무표정하게 음표 하나하나를 연주하고 있는 연주자의 모습을 볼 때면, 매춘은 아마도 이런 기분일 것이라고 깨닫는다. 혼자 열정을 불사르고 땀범벅이 되어 숨을 헐떡이지만 끝내 매춘부의 차가운 시선, 그 직업적인 딱딱한 태도와 마주하게 되고, 그 순간 덧없는 환상은 깨어지며 너무나도 재빠르게 비루한 현실 속으로 내동댕이쳐지는 것이다.

그저 인내할 뿐인 삶에 대한 씁쓸한 환기. 너도 나도 마주하고 있는 순간에는 그저 역겨움을 참으며, 인생을 견디고 있을 뿐이다.

2010/09/19 17:31 2010/09/19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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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면 해가 뜨는 것을, 저녁이면 해가 지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나는 깨닫고 있었다. 내 시간은 태양 주위를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무한히 도는 그 반복적인 하루 속에 갇혀있음을. 잠시 등을 돌렸다가 언제나 같은 태양 앞으로 돌아갔다. 밤이면 하늘은 무수한 별들로 뒤덮이고, 거대한 천체들의 움직임은 우주를 가득 채우지만, 땅 위에 두 다리를 딛고 선 작은 존재의 가슴에 고독이 스미는 것을 막을 길은 없었기에. 오늘을 어제로 밀어 낼 새로운 시간이 새겨지지 않는 기나긴 하루 속에서, 사랑하지 않으며 보내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젊음이 잠식되고, 나는 조금씩 인간성을 상실하고 있었다.

내가 웃어넘기지 못 할 일은 없다. 나의 실존을 의심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지만, 내가 경험하고 있는 유일무이한 현실, 내가 영위하고 있는 단 한 번뿐인 삶 구석구석을 들쳐보려고 하면 무엇 하나 안개 밖으로 꺼낼 수 있을 만큼 구체적으로 그려낼 수가 없었다. 삶이, 어딘가 사실적이지 않다. 죽어도 죽을 것 같지 않은 느낌, 혹은 죽어도 산 것과 별로 다르지 않을 것 같은 느낌, 또는 이미 죽어있는 느낌. 그 비현실적인 세계에서는 살아야 할 이유도, 죽어야 할 이유도 찾을 수 없다. 안녕이라는 말을 남기기에조차 내게 이 세상은 너무나 공허하다.

그렇다면 내 최선의 것을 너에게 주겠다. 사랑 받지 못 하는 외로움이 아니라, 사랑 하지 않는 고독. 내겐 먼저 사랑할 대상이 없었고, 이제는 쏟아 부을 마음이 없어졌다. 어느 사이엔가 나는 말라버린 우물처럼 텅텅 소리를 내는 공동이 되어버렸다. 그 밑바닥에서 찾아낸 마지막 한 줌의 것을, 이제 자유롭게 날려 보낸다. 그 검불 같이 가벼운 생이 무한의 속도로 질주하여 단지 공기에 부딪히는 것만으로도 무수한 파편을 흩뿌리다가 이내 유성의 긴 꼬리를 남기며 사라진다. 그 흔적이 내가 이 세상에서 흘린 단 한 방울의 눈물이며, 나의 모든 상상력을 다하여 만들어낸 유일한 감각이다.

그리고 이제 완전히 텅 비어버린 나는, 너로부터 분리된다. 처음으로 나의 태양이 저무는 것을 바라본다. 붉게 물든 하늘 아래, 거무스름한 산자락 위에서 최후의 빛이 명멸한다. 나는 등을 돌려 이 영원할 것만 같았던 하루로부터 떨어져 나와, 빛과 온기를 어제의 것으로 밀어내면서 어두우며 차가운 공간 속으로 멀어져간다.

2010/09/12 15:30 2010/09/12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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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이 세상을 비추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 인간들의 오만한 착각일지도 모르나, 그렇다면 태양은 침묵만이 영원한 시간을 지배하는 저 차디찬 공간 속에서 다만 홀로 빛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풀잎에 맺힌 작은 이슬이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아침이면 하루 일과를 시작할 준비와 함께 동쪽으로 기지개를 펴는
만물의 경배를 받고, 곧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소란한 소리를 듣다가, 저녁이면 금빛으로 물든 만안의 물결의 찰랑거림과 함께 서서히 잠들어가는 세상의 영송을 받는 태양은, 다만 무한한 공간 속에서 차갑고 고요한 돌들 위에 외롭게 빛나고 있을 뿐인 별들보다 어쩌면 조금 더 행복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순진한 상상인 것일까?

아티쿠스여, 우리 인간의 오만함은 어쩌면 이와 같은 엉뚱한 상상이 빚어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온 세상을 두루 비추는 태양처럼, 마치 이 세상을 전부 포괄하고 있는 듯이 여겨지는 하나의 운명 앞에서 빛나기 위해 스스로 불덩어리가 되어버리고 싶어 하는 것, 자신이 텅 빈 것은 생각지 않고 남의 벌통에 꿀을 가득 채워주고 싶어 발을 동동 굴러야 하는 가련한 인간의 인생을 떠올릴 때면 나는 서글퍼져서 이를 비웃을 수조차 없다.

아티쿠스여, 운명은 얄궂은 것이다. 나는 일찍이 어느 한 사람으로 인하여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에 눈을 떴고
매료되었다. 그런데 정작 나의 인도자는 그 무엇에도 매료되지 않는다더군. 자기 내부의 연료로 이미 활활 타오르고 있는 그 삶 앞에서, 나는 왜소하고 희미해졌다. 그렇다면 아티쿠스,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살았던 것일까?
지난 몇 년간의 삶에는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어떤 자유는 씁쓸한 것이다. 누군가를 계속 사랑하고 있다는 어리석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보다, 내가 더 이상 아무도 사랑하고 있지 않음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이 훨씬 더 고통스러운 일이지. 자신을 옭아매는 고통의 사슬을 끊어버리려고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가진 단 하나의, 너무 허황되지만 그렇기 때문에 가장 황홀한 행복의 환상까지 함께 놓아버려야 하니까.

인생은 한 줄, 아니 어쩌면 한 점. 무한한 공간을 목적도 없이 표류하다 어느 순간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지금껏
자신이 믿어왔던 모든 법칙이 어그러지는 곳으로 휩쓸려가게 되는 것인가 보다. 그리하여 한 번 넘어서면 결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사건의 지평선 너머로 영원히 굴러 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지.

격류 속에서 나는 많은 것을 털어버렸다. 꼭 내 삶을 위한 무게와 부피만을 남겨두고서.

이윽고 언젠가 내가 별이 될 수 있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는 내가 무엇을 위해 빛나야 하는지 알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2008/06/13 15:27 2008/06/13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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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하가 햇빛을 도시의 구석구석까지 실어 나르는 그 아름다운 곳에서 깊이 생각해 보려무나. 참된 자유란 무엇인지, 자유로운 삶이란 대체 어떤 형태의 삶을 말하는 것인지를. 혹시 우리의 삶 깊숙한 곳에 더 많은 자유가 숨겨져 있지는 않을까 싶어 샅샅이 살펴보면, 종국에는 이전에 모르고 있던 새로운 빚 증서만이 손에 쥐어져 있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더냐.

누군가가 이렇게 주장했지,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생존권을 부여받는다고. 그리고 후세의 사람들은 여기에다 여러 가지 권리들을 덧붙였다. 자유니, 평등이니 하는 것들 말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그 좋은 권리들을 누리는 데에는 그만한 대가도 따르는 게 이치 아니겠니. 어쩌면 우리가 탄생하는 그 순간, 우리의 인생에는 차압 딱지가 나붙는 것일지도 몰라.

사회라는 울타리가 언제나 우리의 좋은 것들을 지켜주는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란다. 이 울타리는 제도니 문화니 하는 다양한 재료들로 만들어져 있는데, 어떤 때는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는 욕구와 의문들을 반사회적이라 규정짓고 울타리 밖으로 내던져 버리곤 한단다. 너는 인간들이 자연발생적으로 도덕을 익히고,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다고 믿을 지도 모르겠다. 정말 정의(正義)라는 것이 인간에게 내재된 본연의 속성이라면, 사람들은 대체로 옳은 판단을 내릴 것이고, 그 결정에 의심을 품을 필요도 없겠지.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인간들의 군집은 단순한 합산의 차원을 넘어 그 자체로 거대한 하나의 괴물이 되어버리는 것 같다. 그 괴물이 어떤 규범의 몽둥이를 폭력적으로 휘두르면, 나약한 개인은 그것에 맞고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지.

네가 어떤 사람과 마주할 때 느끼는 대화의 단절, 설득의 불가능함,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을 것 같은 소통의 장벽은 단지 너와 그 사람 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일까? 대체로 자유를 사랑한다는 사람들일수록 자신들이 어떤 구속 속에 놓여있는지를 몰라. 혹 언제든 체면치레를 위해 교양 있는 척하려 애쓰는 가련한 인간들을 보거든 시험 해 보려무나. 그들을 가혹한 구속에서 조금이라도 해방시켜주려고 약간의 조언이라도 하려하면, 곧바로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자유로운 상태에 있는지를 격앙된 태도로 역설하고 나설 것이다.

자연의 법칙 이외에는 아무런 구속도 존재하지 않는 야만의 상태에서라면, 인간은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렇게까지 하지 않더라도, 나는 네가 고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머나먼 타국에 있다는 것이 흡족하구나. 대개 사람들의 지식이나 규범의식이란 그들이 살고 있는 고장의 면적보다 넓지 않단다. 네가 그 배타적인 한계를 넘어서서 이방인으로서 살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다만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존재에게 필연적으로 닥쳐오는 고독은, 역시 우리가 감수해야만 하는 대가이겠지.
2008/06/10 15:26 2008/06/10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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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때는 모든 일들이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떤 때는 주위의 모든 것들이 미쳐 돌아가는 것만 같다. 그런 때에, 시계의 저 가느다란 바늘이 매초마다 정확히 정해진 간격만큼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나무 그늘에 숨은 채 우렁차게 울어대던 매미가 어느 날 바짝 마른 시체가 되어 내 발 아래 나뒹굴었다. 여름은 여전한가? 나는 태양을 올려다보았다. 상징은 그렇게 감상적 시간의 흐름을 농락하지만, 그러나 나는 아직도 들끓어 오르는 한여름 속에 있다.

일본 열도는 이상 고온에 시달리고 있다. 며칠 전에는 일본 기상 관측 사상 최고 기온이 기록되기도 했다. 달아오른 공기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아니, 실제로 사람들이 죽기도 했다. 그들은 살해당한 것이다. 바로 태양에게 말이다!
아스팔트가 부글부글 끓어오를 것만 같은 한낮의 열기 속에 서 있으면, 목덜미로 태양 광선의 무게가 실리는 것만 같다. 신체는 열기를 날숨에 실어 통해내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고자 하지만, 입 속으로 들어오는 공기는 그저 뜨겁고 습습할 뿐이다.

생명의 유무를 떠나서 모든 물체가, 이 가혹한 날씨에 대항할 어떤 뾰족한 방법도 없이, 그저 견디고만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끈기 있는 인내심이야 말로 최상의 해결책이 아닐까. 그렇다, 어떤 것들은 내가 여전히 알지 못하는, ‘인내하는 방법’을 익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더위에 밀려 아득히 멀어졌던 정신이 어느 순간 돌아오면, 다른 차원으로 산산이 흩어졌던 시간들이 한 순간에 덮쳐오는 것만 같다. 그럴 때면 이 긴 하루가 아직도 이어지고 있음에, 이 여름이 아직도 건재함에, 내가 아직도 이 나라에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만다. 그리고 이렇게 외치는 것이다, 나는 왜 여전히 스물한 살이란 말인가?

어째서 인간은 과거의 시간을 돌이켜 보면서는 쇠하고 희미해져버린 가능성에 애석해하고, 미래의 시간을 상상하면서는 너무나 작아져버린 희망에 절망하는 것일까. 그리하여 과거에서도 또 미래 그 어디에서도 행복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지도, 그려보지도 못 한 채 현재의 시간을 의미 없이 흐르는 과거의 강으로 흘려보내며, 모든 불가측성을 배제한 가장 형편없는 미래로 굴러가고 있는 것이다.

아티쿠스여, 장기 놀이를 기억하는가? 네모반듯한 모양의 세계위에 갖가지 말들이 늘어서서, 그 작은 천하를 얻기 위해 싸운다. 장기 놀이를 하는 선수는 가급적 자신의 말들을 죽이지 않으려고 노력하기 마련이지만, 결국 죽이지 않고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그 작은 세상은 말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혼전에 돌입하게 되는데, 마치 신처럼 세상을 관조하고 모든 말들을 멋대로 움직이던 선수도 모든 앞길을 꿰뚫어보지는 못 한다.

이 혼전 속에서 어떤 말은 자신의 죽음과 맞바꾸어 세상의 형세에 변모를 가져오기도 하고 어떤 말은 그저 의미 없이 죽어버리기도 한다. 선수가 미처 깨닫지 못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어버리는 경우도 빈번하다.

아티쿠스여, 아무런 예측도 할 수 없이, 즉 어디에선가 날쌘 자객이 날아들어 순식간에 의미도 없이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럼에도 장기판 위에서 오직 한 걸음, 앞으로만 전진하도록 숙명 지어진 졸병은, 지금의 나와 닮아있지는 않은지?

아니, 죽음은 어쩌면 더 나은 결과이며, 어쩌면 더 가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의미 없이 죽는 것보다 의미 없이 사는 것이, 언제나 더 두렵고 끔찍한 일이니까 말이다.

나는 이곳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있다. 내일이 밝으면, 나는 딱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장기판의 새로운 칸에서, 나를 싣고 갈 운명의 흐름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욕망에 넘치지만 애정이 없고, 따스한 온기를 머금은 모래사장을 산책하는 것이 아니라, 가느다란 외줄 위를 위험천만하게 걸게 하면서, 그 위태로운 목숨을 더욱 위협하며 어떤 나락으로 전락시켜버리려는 음흉함, 파괴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유혹의 망령이, 오늘밤 나를 광기로 몰아넣는다.

낮은 곳에서는 하늘을 올려다보지만, 높은 곳에서는 아래를 내려다본다. 밤하늘의 별들을 모조리 떨어뜨려 놓은 듯 반짝반짝 빛나는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며, 그 불빛 하나하나가 실은 한때 사람들이 하늘에 걸었던 소원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새벽녘 끝도 없이 이어진 길을 따라 어딘가 먼 곳으로 사라져가는 자동차의 저 희미한 미등은, 한없이 약한 불꽃, 한줌의 온기에 불과하지만, 분명 거대한 화염의 불씨가 되기 위한 여정에 있는 것이라고, 그렇게 믿어본다.

아티쿠스여, 그렇다! 어쩌면 현실은 비루한 것이다. 상상만큼 멋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자연에게 기대할 수 없는 그 무언가에 대한 강렬한 욕망에 의해 움직이며, 존재를 넘어서는 신기루를 갈망하여 여행을 떠난다. 그렇게 믿고 있으면, 죽음에 대한 공포도 더 이상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 한다. 나는 어느 때고, 그 여로의 어디쯤에선가 반드시 쓰러질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나의 등을 떠미는, 거역할 수 없는 세속의 운명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으며, 앞으로 한 걸음 내딛어야만 하는 병졸의 숙명에 따라, 새로운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 것이다. 또 내 앞으로 닥쳐오는 어떤 가혹한 운명의 홍수에도, 저 뜨거운 태양을 견디고 서 있는 나무처럼 우직하게 버티어낼 것이다.

다음 편지는 신선한 바람에 실어 보내도록 하겠다.
2007/08/20 15:23 2007/08/20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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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에게 묻노니, 휘황한 빛이 밤하늘을 물들이던 만월(滿月)의 밤, 어느 객이 낯선 땅을 딛고 서서 가슴을 부풀리던 그 때로부터, 그대 그 뾰족한 뿔을 세우고, 이지러지고, 다시 차기를 몇 회나 반복하였는가?

닿을 수 없는 빛을 향하여 손을 내뻗어 허공만 움켜쥔다. 미지근한 공기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그렇다, 아티쿠스여! 시간이 흘렀다. 하루하루 조금씩 식어가는 공기가 초목의 낯빛을 바꾸어가는 것을 목격했다. 헐벗은 나뭇가지 사이로 겨울의 창백한 태양빛을 보았다. 약간의 관찰력을 지닌 사람이라면 봄날의 서서한, 그러나 너무나도 확실한 변화에 감동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항상 ‘오늘’은 ‘어제’와는 다른 날이었고, 한때 잠들어갔던 모든 것들이 일제히 다시 깨어 돌아오곤 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어느 새 나를 성하(盛夏)의 폭발하는 절정 속으로 밀어 넣었다.

며칠 전 길을 걷다가 우연히 보름달을 목격하였을 때 깨달았다. 저 보름달이 이지러지고 다시 차올랐을 때에는, 나는 이미 이곳에는 없을 것이라고. 사계절의 순환을 지켜본 이 공간과 나는, 머지않아 분리될 것이다. 그 달이, 나에게 분명한 과제를 내려주었다. 그 짧은 주기가 지금 나에게 주어진 시간의 전부라면, 그 안에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게 했다. 그렇다. 아마도 내가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단 한 가지 작업은, 글을 쓰는 것일 것이다.

바라건대 어디에서나 같은 달을 바라볼 수 있기를! 표현이 이곳에서의 삶을 하나의 형태로 완성시키면, 나는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도 그 의미를 환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영원의 보름달로서 간직하게 될 것이다.

아티쿠스여, 이것이 정녕 내가 나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이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2007/08/07 15:21 2007/08/07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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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이 닿지 않는 마음의 저변에 깔린 어둠, 그 한 구석에 불안은 웅크리고 앉아 있다. 깊은 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듣는다. 며칠 째 우울함을 벗어버리지 못 하는 하늘이, 습기에 가득 찬 공기가, 무엇보다도 마음을 차갑게 적시는 빗물이 나를 깨친다. 절정의 나날이 지나가고, 나를 가두어버린 이 음울한 시간은 아주 천천히 흘러갈 것이라고.

우산을 비스듬히 받쳐 들고 바짓단을 적셔가며 내딛은 무신경한 한 걸음에, 의도하지 않은 무게가 실려 있었다. 소모(消耗)의 피로와 정체(停滯)의 불안이 실린, 한숨과도 같은 한 걸음을 축축한 땅 위로 내딛어 물방울이 튀어 오르고 철퍽 하는 소리가 들렸을 때, 나는 고개를 들고 온통 젖어가는 이 세상을 바라보아야 했던 것이다.

어느 한 방향에 시선을 고정하고 그렇게 앞으로 걸어가다 보면 또한 눈여겨보아야만 했던 많은 것들에는 주위를 기울이지 못 하고 지나쳐버리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후회를 막아주는 방패가 될 수는 없다. 천분을 배반하고 스스로를 기만하면서까지 끌어안으려 했던 유쾌함은 나의 품 안에서 산산이 부수어져 무수한 유리 조각이 되어버리고 말았으니까.

인간은 늘 절정의 삶을 살 수는 없다. 시간의 흐름은 사람의 등을 떠밀어 산의 꼭대기에서 밀어내고, 다시 등줄기를 타게 만든다. 정점도 아니고 계곡도 아닌 등성이 어느 곳에서 멈추어 바위에 걸터앉아 안개로 눈을 흐리고 위도 아래도 바라보지 아니하며, 다만 어린애처럼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않겠노라고 생떼를 부려보려 해도, 붙잡은 고목의 앙상한 가지는 나를 당기지도 밀치지도 않는데.

아, 아티쿠스여, 나는 내려가야겠다. 가장 낮은 밑바닥으로, 모든 하찮은 것들이 흘러드는 계곡으로 내려가야겠다. 그리고 구름으로 뒤덮인 어두운 하늘을 마주하고 서서, 떨어지는 마지막 한 방울의 빗물까지 전부 맞아야겠다. 칠흑의 어둠 속에서 새벽의 빛을 건져 올리듯, 심중심연(心中深淵)으로 가라앉아 방향을 더듬는다. 그렇다, 아티쿠스여! 오직 글을 쓰는 자만이 자기 내부의 모순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하늘의 한 구석에서부터 여명이 밝아올 때, 퀭한 눈을 가진 불안의 짐승이 다시 마음의 그늘로 몸을 숨기면, 나는 비할 데 없이 무거운 한 장의 종이를 올려놓아 형편없이 기울어버린 저울에 균형을 되찾아 줄 것이다.
2007/07/29 15:19 2007/07/29 1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