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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글은 대전시립교향악단 공식 홈페이지의 악단 소개 코너에 게재되어 있는 것이다. 대개 어떤 단체든 그들이 운영하는 공식 홈페이지의 소개 페이지에는 해당 조직의 설립 취지나 비전을 소개하고 있다. 윗글에서 비록 ‘비전’이라는 단어는 찾아볼 수 없으나 아마도 이 자못 장대한 기상이 느껴지는 글은, 대전시향이 스스로 설정한 비전이며, 정체성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대전시향의 가장 큰 문제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바로 이것’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비전이라고 하는 것은 조직과 그 조직을 구성하고 있는 개개인이 모두 공유하고 있는, 미래에 대한 바람직한 구상이다. 비전이 너무 구체적일 필요는 없지만(어떤 기업도 매출 100억 달성! 따위의 목표를 그들의 ‘비전’으로 삼지는 않는다), 조직원들이 애써 달성하고자 하는 어떤 목표를 넌지시 암시하고는 있어야 한다. 요는 그저 좋은 말들을 모조리 가져다 나열한다고 해서 좋은 비전이 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심지어 위의 글을 찬찬히 읽어보면, 대부분의 내용이 미래에 대한 방향 제시라기보다는 이미 달성한 과업의 선전에 가깝다. 이런 훌륭한 치적과 실력을 가지고서 시민 사회에 기여하는 놀라운 오케스트라를 나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도 찾아보기 힘들 거라 생각하는데, 그게 바로 내 고장에 있는 오케스트라라고 하니 감격에 겨워 허파에 바람이 찰 지경이다.

내가 지금까지 세 번의 연주회를 감상하면서 이 조직에 대해 내릴 수 있었던 결론은, ‘평균적인 실력을 가진 월급쟁이 음악가들의 집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오케스트라’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흔히 사람을 매우 딱딱한 태도로 대하는 샐러리맨들에게 부정적 함의를 담아 ‘직업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곤 하는데, 바로 그 직업적 태도를 대전시향의 연주자들에게서 느낄 수 있다. 그들은 나에게 어떤 엔터테인먼트를 제공(이건 그들이 주장하는 비전 중의 하나이다)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하기 위해 무대에 올라가서 일을 하고 내려간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그들의 사무 공간에 불려가 그들이 일과 중에 업무를 처리하는 모습을 구경하다가 나오는 것이다. 아니 대체 내가 왜?

이건 매우 도발적인 주장이고 많은 비난을 받을 수 있는 말이긴 하지만 사실을 적시(摘示)하자면 한국의 연주자들은 대체로 지성이 부족하다. 나는 그들에게 ‘연주란 무엇일까요?’라고 물었을 때 ‘뭐긴 뭐야, 밥벌이 수단이지!’라는 대답이 돌아올까 봐 두렵다. 그들은 자신들이 연주하는 곡을 정말 잘 이해하고 있을까? 그 곡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느껴본 적이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자신들의 연주로 관객들에게 곡을 이해시키고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 줄 수 있단 말인가!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 느끼는 인간의 속성을 감수성이라고 한다. 시인 보들레르는 어린 소년과 예술가의 공통점은 바로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렇다고 해도 소년의 감수성과 예술가의 감수성은 분명 다른 것이다. 소년의 감수성은 무엇에든 쉽게 자극을 받고 과잉 정서를 생산 해 내며 종종 그 감정 과잉 상태에 중독되는 감상주의에 빠져들지만, 예술가의 감수성은 훨씬 분별력이 있어서 아무 것에나 감동 받지 않고, 또 절제 없이 과잉된 감정들을 배설해내지도 않는다. 이런 감수성이야말로 진정한 ‘심미적 감수성’인데, 심미적 감수성을 뒷받침하는 것은 감성(感性)보다는 지성(知性)의 역할이다.

내가 볼 때에 단원들에게는 심미적 감수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것은 심미적 감수성을 잉태할 ‘지성’이라는 모태가 결여되어있기 때문이다. 지성이 결여된 개인들의 집합은 양몰이 개의 짖음에 따라 여기저기 우르르 몰려다니는 양떼와 비슷하다. 목동은 그들을 잘 몰아서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게 할 수도 나오게 할 수도 있지만, 언제나 지휘자가 긴장의 끊을 놓지 않을 때에만 의도대로 움직이며, 도무지 자기 생각을 가지고 스스로 행동하지 않는다.

윗글에 언급된 것처럼 이 연주 단체가 수차례 해외 연주와 서울 연주를 통해 국내외의 언론으로부터 찬사를 받았으면서도 유독 자기 고장 안에서 나 같은 일개 시민에게 이토록 욕을 얻어먹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들은 해외 순회공연이나 서울 공연처럼 많은 전문가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중요한 연주가 아닌, 본고장의 어수룩한 시민들 앞에서 하는 연주회에서는 너무 쉽게 긴장을 놓아버리고 마는 것이다. 지휘자도, 양몰이 개도 신경을 덜 쓰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능력이 없는 양떼는 질서를 잃고 멋대로 움직인다. 나는 이 연주 단체가 보다 잘 연주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들은 지난 세 번의 연주회 동안 내 앞에서 그 역량을 다 발휘해서 보여준 적이 없다. 어디에서 얼마나 훌륭한 연주를 하고 무슨 칭찬을 들었든, 나는 오직 내 귀에 들리는 연주만으로 평가할 수 있을 뿐이다.

내가 이 단체에게 무슨 충고를 한다 한들, 그것은 부질없는 짓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고장의 오케스트라에 대한 한 가닥 실 같은 애정 때문에 몇 마디 하자면, 우선 단원 개개인들에게 전혀 접수되지 않는 저 거창한 비전은 집어치우고, “대전의 어린이들이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기를 꿈꾸게 해 줄 수 있는 시향” 같은 소박하지만 확실히 각인되는 비전을 세우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무슨 해외파/유학파 출신의 실력 있는 인재를 고용하거나 마스터클래스를 열어 기량을 향상시키는 것을 도모할 게 아니라, 단원들에게 음악 영화와 작곡가들의 전기, 음악을 주제로 한 소설 같은 것을 보라고 권하길 바란다. 단원들이 음악의 진정한 가치와 연주의 참 의미를 깨닫게 되면, 양몰이 개의 윽박지름 없이도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향해 움직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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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시향을 비판하는 글을 너무 길게 써버려서, 연주 자체에 대한 평은 간략히 줄이고자 한다.

1부에서는 브람스의 곡만 두 곡이 연주되었는데, 어지간하면 국내 오케스트라는 브람스를 더 이상 연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도마 위에서 두부 썰듯 하는 브람스 연주는 듣기에 괴로운 수준을 넘어서 가슴이 참 아프다. 음악의 구간구간을 레터로 나눈다면, A 다음에 B, B 다음에 C 하는 식으로 순서대로 소리만 낸다고 ‘연주’가 되는 것이 아니다. 전체적인 구성, 파트간의 밸런스, 한 프레이즈 안에서 자신의 역할, 프레이즈와 프레이즈의 연결 같은 것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앙상블이 이루어질 수 없다. 이래서야 교향곡에서도 실내악 같은 앙상블을 구현한 브람스의 음악을 어떻게 연주할 수 있단 말인가? 세세한 부분은 더 지적하지 않겠다.

2부 슈베르트의 교향곡 9번은 1부의 곡들보다는 훨씬 괜찮았다. 3악장 스케르초가 너무 산만했던 것을 제외하면, 1, 2, 4악장은 연습한 흔적이 꽤 보였고, 2악장 연주 때는 앙상블에도 주의하는 것이 느껴졌다(동행한 지인은 ‘여기다’하는 부분에서만 너무 호흡이 잘 맞아서 오히려 웃겼다고 했다). 최소한 이 정도의 집중력을 연주회 내내 고르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방법은 위에서 길게 썼으니 반복하지 않겠다.

2012/06/26 00:52 2012/06/26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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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大家)는 어떻게 탄생하는 것일까? 대중의 환호와 갈채로? 선배 세대의 거창한 찬사를 받아서? 언론과 비평가들의 호평 속에? 기획사들의 홍보 전략에 힘입어서? 대가라 칭해지는 이들은 무엇이 다른가? 보다 본질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대체 무엇에 환호하는가?

내가 궁극적으로 체득하고자 하는 예술적 감수성의 경지는 대중의 환호와 갈채에 현혹되지 않고, 언론과 비평가들의 그럴듯한 말들에 휘둘리지 않으며, 그 어떤 정통성과 권위보다도 나의 눈과 나의 귀에 의지하고 나의 지성으로 판단하여 진정한 미(美)의 가치를 꿰뚫어보고 즐기는 것이다. 사람들은 ‘취미 생활’을 남들이 마련 해 놓은 해석과 비평을 취하고, 심지어는 그들이 미리 설명 해 놓은 대로 감정까지 느끼는, 편의적이고 양식화된 행위쯤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나는 스스로 이해하고 느낀 것이 아니면 나의 감정으로 인정할 수가 없고, 그런 기만적인 감정의 모사품들을 정기적으로 구매하는 행위를 취미 생활로 인정 할 수도 없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이상론이다. 무감동의 벽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우선 무지의 벽을 깨부수어야 한다는, 나의 신념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나는 어쩌면 평생 결론에는 도달하지 못 한 채 다만 과정에 머무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쉽지 않은 과정에 기꺼이 자신을 밀어 넣는 것이야말로 끊임없이 창작을 거듭해온 예술가들에 대한 예의이며, 사실상 인생에서 가장 큰 즐거움을 얻어낼 수 있는 진정한 취미 생활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즐거움은 현란한 수사어로 장식된 예술가의 이름에 있지 않고, 좋은 자리를 점하기 위해 쏟아 부은 티켓 값에 있지 않으며, 애써 상상으로 그린 하룻밤의 낭만 속에 있지 않다. 더욱이 내가 진정으로 느끼지 못 한 바를 꾸며 쓰느라 애처롭게 늘어져버린 감상문 속에는 즐거움이 있을 수 없다.

즐거움이 있다면, 겸허하게 나의 무지를 인정하여 내가 모르는 무한히 넓은 영역의 존재를 확인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 무언가에 대해 스스로 이해해보고자 기울이는 서툴지만 진지한 노력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희열을 결실로 선사한다. 주의 깊고 세심한 관찰은 피곤하지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가만히 넋 놓고 바라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를 건져 내준다.

첼리스트 장한나. 그녀에게 쏟아지는 갖가지 찬사는 내게 별 의미가 없다. 그녀에 대한 평가가 부풀려졌다거나 칭찬 일색인 리뷰가 못 마땅하다는 게 아니다. 오히려 나는 그녀의 위대함을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그 위대함을 직접 느끼고 싶을 뿐이다. 이때에, 프로그램 북에 인용된 노(老) 대가들의 거창한 칭찬은 별 도움이 안 된다. 미리 계획했던 기립박수를 치는 것은 씁쓸한 일이다. 무엇에게 그토록 열렬한 박수를 보내야 하는 것일까? 나는 무엇에 환호해야 할까?

토요일 저녁, 지난 성남시향 연주회 때의 악몽을 되살리기 싫어서, 이번에는 양재역을 거쳐 남부터미널역으로 간 다음 버스를 타는 길을 택했다. 연주회 시작 30분전쯤 콘서트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로비에서는 1,000원짜리 프로그램 북과 함께 장한나의 리코딩을 팔고 있었다. 가격은 한 장에 14,000원이었는데, 프로그램 북과 함께 구입하면 포스터를 증정한다고 되어 있었다.

나는 이런 상술에 잘 넘어가주는 편이다. 그러나 판매중인 CD는 대중들의 입맛을 고려했는지 소품집이거나 유명 첼로 협주곡들의 일부 악장들만 모아놓은 것으로 별로 구매욕을 자극하지 않는 것들이었다. CD와 증정용 포스터는 포기하고, 프로그램 북만 하나 달랑 구입하여 연주회장으로 들어갔다. 자리는 1층 C블록 11열 5번. 무대와 너무 가깝지 않으면서도 연주자를 정면에서 바라볼 수 있는 좋은 자리다. 연주회장은 만원이었다. 합창석 자리에도 관객들이 앉아 있었다. 과연 장한나란 이름이 갖는 관객 동원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었다.

저녁 8시. 연주 시작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오고, 객석 쪽 조명이 어두워졌다. 무대 쪽 천정에서 내려오는 밝은 빛은 스타인웨이 피아노와 단상 위에 놓인 빈 의자를 비추고 있었다. 이윽고 무대 왼쪽의 연주자 출입구가 열리고, 오늘의 주인공 첼리스트 장한나와 피아니스트 피닌 콜린즈가 등장했다(물론 반주자의 악보를 넘겨줄 넘순이도 함께).

장한나는, 벌써 기억이 모호하지만 짙은 회색 톤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한 손으로 들고 나온 첼로는 각봉이 끝까지 뽑혀 있었는데, 그 길이가 장한나의 키와 비슷해 보였다. 키는 작았지만, 왜소해 보이지는 않았고 오히려 단단해 보였다. 한편 피아니스트 피닌 콜린즈는 매우 늘씬한 미남이었다.

연주회 첫 곡은 슈만의 피아노와 호른을 위한 아다지오와 알레그로Adagio and Allegro for Piano and Horn Ab Major, Op.70이었다. 이 곡은 제목에도 나와 있듯이 본래 피아노와 호른의 듀오로 연주되는 곡이다. 프로그램 북에 적힌 설명에 따르면 호른 부분을 다른 악기가 맡아 연주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평소 슈만의 곡들과 친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더군다나 호른 레퍼토리라니, 존재조차 몰랐던 곡이다. 인터넷에서 확인한 프로그램에는 이 곡이 빠져있어서, 미리 예습 할 기회도 없었다.

연주회장에서 처음 만나는 곡이 신선한 즐거움으로만 다가오면 좋겠지만, 내 경우엔 사실 잘 모르는 곡의 선율은 귀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망각되기 시작한다. 더군다나 곡을 들으면서 뒷부분을 예측할 수도 없기 때문에, 곡에 대한 집중력도 떨어진다. 그러니까 종종 딴 생각을 하게 된다는 거다. 그래도 곡을 들으면서 문득 든 매우 즉각적인 생각은, “이걸 호른더러 불라고 작곡했단 거야?”란 것이었다. 물론 난 호른을 불어 본 경험은 없다. 하마터면 오케스트라 동아리에 바이올린 연주자가 아니라 호른 연주자로 들어갈 뻔했지만, 아무튼 그 운명은 나를 빗겨갔다. 그래도 호른이 불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첼로로 연주하는 것이 테크닉을 구사하기에는 호른보다 훨씬 유리하겠지만, 그래도 만만해 보이지는 않았다. 알레그로 부분에서는 스트로크로 강렬하게 연주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는데, 과연 호른으로도 이런 강렬함이 표현될 수 있을지 궁금했다. 호른 레퍼토리는 거의 모르지만, 언젠가 세브란스 아마추어 오케스트라가 호른 협주곡을 연주하는 것을 보러 간 일이 있었는데, 호른은 독주 악기로 쓰이기에는 좀 밋밋하다고 느꼈다. 물론 아마추어의 연주에다가,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이었으니까 더욱 그렇게 느껴졌겠지만.

슈만의 곡이 서곡 역할을 해주어, 들떴던 마음도 차분히 정리되고 연주에 집중할 자세가 갖추어졌다. 연주회장에 늦게 도착하여 미처 입장하지 못 했던 사람들도 첫 곡이 끝난 틈에 들어와 앉을 수 있었다. 그리고 비로소 오늘의 본 공연이 시작되었다. 브람스의 첼로 소나타 1번과 2번. 어제는 분당에 첫눈이 내렸다. 첫눈은 겨울의 시작을 알려주는 것이다. 벌써 가을은 저만치 물러가고 있지만, 브람스의 음악은 가을의 끝자락을 붙잡고 향수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제공한다.

브람스의 첼로 소나타 1번은 애수로 가득 차 있다. 3개의 악장이 모두 단조로 작곡되어 있어서 한층 쓸쓸한 정취를 풍기는 것 같다. 첼로는 낮은 음역에서 때로는 읊조리는 듯이, 때로는 애달프게 노래하는 듯이 자기 목소리로 감정을 담아 표현한다.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첼로 소나타 1번의 1악장은 브람스의 여러 음악들 중에서도 특히 첼로가 노래를 하고 있는 듯 느껴진다. 첼로와 피아노의 대위법적인 진행은 참 아름답다. 음악의 구조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만, 솔로 악기와 피아노로 구성된 듀오 소나타는 편성이 단출해서인지 비교적 음악의 짜임을 파악하는 것이 쉽다.

이날 첼로의 음색과 피아노의 음색이 잘 어우러졌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느끼기에는 피아노의 소리가 조금 먹먹했다. 첼로가 단호하게 베는 듯한 소리를 들려주니까 피아노도 좀 더 단단한 소리가 났으면 좋았을 텐데, 약간 뭉글했다. 연주자의 터치가 그런 소리를 낸 것 같지는 않고, 피아노 자체의 소리가 좀 멍한 편이었던 같다. 대위법을 잘 구사한 브람스고, 3악장은 아예 푸가로 작곡되었으니까 첼로가 선율을 연주하면 피아노가 모방하고, 또 피아노가 선율을 연주하면 첼로가 뒤따라 모방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만큼 두 악기의 음색이 잘 어우러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소나타 1번의 연주가 끝나고 인터미션 시간이 되었다. 인터미션 시간이면 으레 로비의 카페에서 커피 한 잔과 케이크 한 조각을 주문해놓고 프로그램 북이라도 다시 한 번 찬찬히 읽으며 시간을 보내곤 하는데, 이날은 이미 카페 앞에 줄이 길게 늘어서 있어서 그냥 자판기 커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자판기는 리사이틀 홀 출입구 바로 옆에 설치되어 있는데, 출입구 앞에 놓인 프로그램 북을 슬쩍 보니까 이날 같은 시각 리사이틀 홀에서는 첼로 독주회가 열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정각 9시쯤 2부 연주가 시작되었다. 장한나는 정열적인 붉은색의 드레스로 옷을 갈아입고 등장했다. 브람스의 첼로 소나타 2번. 첼로 소나타 1번과는 20년 이상의 시차를 두고 작곡된 곡. 그만큼 원숙미가 돋보인다고 해야 할까. 브람스만의 독특한 분위기는 유지되면서도, 1번 때와는 그 표현의 양상이 상당히 다르다. 3악장을 제외한 나머지 세 악장이 모두 장조로 작곡되어 있는 만큼 곡의 표정은 한결 밝아진 느낌이지만, 그 속에서도 애수가 간직되어 있다.

“연주를 하는 도중 실수로 악보가 두 장 넘어갔을 때, 연주를 멈추어야 한다면 좋은 연주자가 아닙니다.”

졸탄 코다이의 말이다. 이날 장한나는 전곡을 암보로 연주했지만, 피닌 콜린즈는 악보를 보고 연주를 했다. 물론 악보를 넘겨주는 넘순이가 있었다. 넘순이는 악보를 넘기기 전, 악보를 위에서 아래로 거의 반쯤 내려 접어 연주자가 악보의 마지막 줄까지 다 볼 수 있도록 배려 한 다음 연주자의 신호를 받아 악보를 넘긴다. 그런데 1악장 연주 중의 일이었다. 넘순이가 넘기려고 접었던 악보를 놓치는 바람에, 황급히 악보를 다시 잡아서 넘기느라 그만 두 장을 넘겨버렸다. 연주는 어떻게 됐을까? 물론 피닌 콜린즈는 좋은 연주자였다. 연주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진행되었고, 1악장은 무사히 마무리 되었다.

2악장 첼로의 피치카토는 가슴을 쳤다. 이 곡의 2악장은 결코 유약하지 않다. 장한나의 피치카토 연주는 그야말로 박력이 넘쳤다. 현을 뜯으면서 악기를 그토록 풍부하게 울릴 수 있다니, 놀랍다. 그 소리가 연주회장을 가득 채우고도 남았을 것이다.

2악장이 끝나자 또다시 여기저기서 기침이 터져 나왔다. 대체 이 사람들이 연주 중에는 어떻게 기침을 참고 있었나 싶을 정도다. 연신 기침을 해대다가도 장한나가 활을 들어 올리면 신기하게도 기침을 멈춘다. 실황 연주 녹음을 들어보면 악장과 악장 사이에 기침은 세계 공통인 듯도 하지만, 때로는 이 기침 소리가 악장 사이의 눈치 없는 박수 소리보다도 더 거슬린다. 3악장은 피아노의 연주로 시작된다. 사람들은 장한나에게만 집중을 하며, 연신 기침을 해대었다. 그때 갑자기 울려 퍼지는 피아노 선율. 덕분에 미처 기침을 멈추지 못 한 여러 사람 숨넘어갔다.

장한나는 액션이 큰 연주자다. 표정도 다양하다. 그만큼 음악을 온 몸으로 표현한다. 또한 장한나는 힘이 있다. 그래서 두터운 소리를 요구하는 브람스의 음악도 무리 없이 잘 연주 해 내는 것 같다. 분명한 건, 관객을 몰입시키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튼 별로 주의 깊게 살피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 떠드는 짓은 삼가도록 하자. 새삼 그녀의 열정이나 관객을 압도하는 카리스마에 대해 운운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일 것이다.

연주가 끝나자, 관객들은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몇몇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박수를 쳤다. 2부 프로그램이 조금 짧았기 때문에, 몇 곡의 앙코르 곡을 예상하긴 했지만, 관객들의 열광 속에 무려 다섯 곡의 앙코르 곡을 연주했다. 연주된 곡은 차례로 포레의 ‘꿈꾸고 난 후에’,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왕벌(뒝벌?)의 비행’, 오펜바흐의 ‘재클린의 눈물’, 구노의 ‘아베마리아’, 그리고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 중 ‘백조’였다.

장한나의 첼로 스승 미샤 마이스키가 내한 중이라고 한다. 먼저 첼로 독주회를 열었고, 며칠 후에는 하이든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장한나는 스승님과 같은 시기에 한국에 있게 되어 기쁘다며 구노의 ‘아베마리아’ 연주를 스승님께 바치고 싶다고 했다. 왜 하필이면 구노의 ‘아베마리아’인지 모르겠다. 무슨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는 걸까.

앙코르 곡이 하나씩 끝날 때마다 기립박수를 치는 사람들이 늘어서, 막바지에는 홀 안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조’의 연주가 끝나고 연주자들이 퇴장한 후 출입문이 닫혔는데도 사람들의 박수는 멈추지 않았다. 결국 실내의 조명이 환하게 밝히자 그제야 사람들은 퇴장하기 시작했다. 나도 무언가가 발산된 듯한 후련한 마음으로 콘서트홀을 빠져나왔다. 예술의 전당 정문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기다란 줄에 합류했다. 첫 번째 버스를 보내고, 두 번째 버스에 겨우 몸을 실을 수 있었다. 나는 그대로 강남역까지 가서, 분당으로 직행하는 버스를 탔다. 외투 주머니에는 mp3 플레이어가 들어 있었지만, 이 날은 귀갓길에 음악을 듣지 않았다. 애써 잠을 청하지도 않았다. 눈을 감으면, 머릿속에 첼로의 선율이 흘렀다. 11시를 훌쩍 넘겨 분당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니 밤공기가 무척이나 차가웠다. 그러나 이제 저물어버린 가을에 더 이상 미련은 남지 않는다. 겨울을 맞을 준비가 된 것이다.

2009/11/23 17:06 2009/11/23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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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행복해지는 방법 같은 건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불행해지지 않는 확실한 방법은 알고 있다. 그것은 남의 행복을 나의 불행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오늘 하루 행복했던 사람에게는 축복을.

아침에 바이올린 레슨을 받았다. 벌써 네 번째 레슨이다. 스케일을 먼저 체크하고, 카이저 10번, 이어서 하이든 바이올린 협주곡 2번. ‘힘차게, 애절하게, 간결하게.’ 하이든 악보 군데군데 선생님이 적어놓은 것들이다. 음악에도 표정이 있다. 그걸 몰라서 표현 못 하는 것이라면, 개선의 여지는 없어도 마음은 덜 답답할 것이다.

점심때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 나가 외식을 하고 왔다. 간밤에 통 잠을 못 자서 연주회 가기 전에 눈 좀 붙일 요량으로 소파에 누워 TV를 켜니, 마침 Arte TV에서 대한민국 국제음악제의 연주회를 재방송 해 주고 있었다. 음악이나 듣다가 서서히 잠들면 되겠구나 싶었는데, 하필이면 연주곡이 오늘 저녁 성남시향 연주회 프로그램에도 들어있는 브람스의 이중협주곡이 아닌가. 원래 연주회에 가기 전에 곡을 복습(들어본 적이 없는 곡이라면 예습)하는 습관이 있어, 잘 됐다 싶어 졸음을 잠시 참고 연주를 감상했다. 협연자는 바이올리니스트 다니엘 게데, 첼리스트 율리우스 베르거였다. 오케스트라는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 율리우스 베르거라는 첼리스트가 사용하는 첼로, 수령이 400년도 넘은 아마티의 작품이라던가.

브람스의 이중협주곡이 끝나니, 이번에는 지난 9월 유포니아 정기 연주회 때 연주했던 베토벤의 삼중협주곡을 연주했다. 계속 보다가는 연주회장에 가서 졸 것 같아서, 적당히 볼륨을 낮춰놓고 일단 눈을 감아버렸다.

연주 시작 2시간 전쯤 집을 나섰다. 저녁 식사를 하지 않았지만, 조금 일찍 도착하면 간단히 뭐라도 사먹을 요량이었다. 차는 버스 정류장 근처 무료 주차장에 세워두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먼저 강남으로 가서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서초역으로 갈지, 아니면 양재로 가서 3호선 남부터미널역으로 갈지 잠깐 고민했다. 결국 고속도로를 타는 강남역 직행 버스를 타기로 했는데, 이 선택이 잠시 후 예상치 못 했던 엄청난 결과를 몰고 왔다.

도로 사정은 이미 고속도로 상에서부터 심상치가 않았다. 일반차량 도로는 주차장을 방불케 하여 버스가 요금소를 빠져나와 전용 차로로 진입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다. 일단 전용차로에 오른 뒤부터는 어느 정도 속도를 내긴 했지만, 오늘따라 버스가 많아서 여느 때처럼 빨리 달리지는 못 했다. 게다가 이따금 꽉 막힌 도로 사정에 짜증이 폭발한 일반 승용차 운전자들이 무단으로 버스 전용 차로에 진입하면서 버스의 앞길을 가로 막는 일도 생겼다.

반포 IC를 통해 강남으로 빠지는 길목에서 이미 끔찍한 정체가 시작되었다. 교보타워 앞 사거리를 돌아 신논현역 앞 정류장까지 평소라면 5분도 안 걸릴 거리를 가는데, 평소의 몇 배의 시간이 걸렸다. 이미 이 시점에서 내가 여유롭게 저녁 식사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은 사라져버린 것이다. 서울의 교통 혼잡은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지만, 이 엄청난 낭비를 초래하는 도시 문제가 과연 언젠가 해결 될 날이 오긴 할지 의문이다. 이건 문제다. 그러나 누구나 여기에 짜증은 내면서도, 정작 이를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래서 나는 정부 정책으로 행정 수도를 이전한다고 했을 때 쌍수를 들어서 환영을 했던 것인데, 헌재에서 관습 헌법 운운하며 위헌 결정을 내렸을 때 이미 반쯤은 포기했고, 요즘 세종시를 둘러싼 유치한 논쟁을 보면서 완전히 절망했다.

강남역 인근은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정말 아무 것도 없는 강남에 대체 무슨 볼거리가 있다고 사람들이 이렇게 꾸역꾸역 밀려드는지 모르겠다. 인파를 헤치고 강남역으로 걸어가, 간신히 지하철을 탔다. 그러나 여기서 전혀 예상치도 않았던 사태가 벌어졌다.

강남역과 예술의 전당이 가까운 서초역 사이에는 단 한 역, 교대역이 있을 뿐이다. 이동 시간은 길어야 10분 남짓? 서초역에 도착해 출구에서 버스를 잡아타면, 적어도 연주회 시작 10분 전에는 도착할 수 있을 만큼의 여유는 있었다. 배고픈 것은 인터미션 때 로비의 카페에서 케이크라도 한 조각 사먹으면 달랠 수 있을 터. 교통이 혼잡했지만, 지각을 면하게 된 것을 다행이라고 여기며, 이제 막 교대역에서 승객을 태운 열차가 다시 출발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한 차례 열차의 문이 닫혔다가 다시 열렸다. “출입문 닫겠습니다.”란 기장의 안내방송. 다시 닫히는 문. 그러나 이내 문이 다시 열렸다. “출입문 닫겠습니다.” 다시 한 번 방송. 그러나 또 닫혔다 열리는 문.

“승객 여러분께 안내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 열차는 현재 출입문 고장으로 잠시 정차하고 있습니다. 조치 후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이용에 불편을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살다보면 이렇게 뭐든지 꼬이는 날이 있기 마련이다. 강남에서 서초까지 고작 두 정거장 가는데, 하필이면 그 사이에서 열차가 고장 날 게 뭐란 말인가? 처음에는 금방 고치겠지, 했는데 5분, 10분이 지나도 열차는 출발할 생각을 안 했다. 연주회 시작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나는 너무나 어이가 없고 화가 나서 표정이 일그러지고 나도 모르는 새에 주먹을 꽉 쥐기도 했다. 가끔은 정말 있는 힘껏 발로 땅을 구르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을 만큼 짜증이 솟구치기 마련이다.

열차는 15분가량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열차에서 내려, 역 밖으로 나가 택시를 잡아탔다. 도로 사정은 이쪽도 별로 좋지 않았다. 첫 프로그램인 ‘대학축전서곡’은 물 건너 간 것이 확실했다. 이제는 두 번째 프로그램 전에만 입장할 수 있기를 바라야 할 판이었다.

콘서트홀에 도착했을 때, 홀 안에는 대학축전서곡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서둘러 현장매표소에 가서 티켓을 구매했다. 프로그램 일부를 놓쳤지만, 그래도 R석 괜찮은 자리의 표를 샀다. 일단 화장실에 들러 땀을 좀 닦아내고, 호흡을 가다듬은 뒤, 로비에서 역시 지각한 한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 입장을 기다렸다. 금방 대학축전서곡이 끝났다. 직원은 티켓에 적힌 좌석과는 상관없이 일단 가까운 빈자리로 안내를 해주었다.

다행히 협주곡을 놓치지 않아서 안도했지만, 숨 가쁘게 온 터에다 아직도 분노가 가라앉지 않아서 1악장 연주 때는 연주에 좀처럼 집중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2악장 안단테가 시작되자 차분한 주제 선율에 마음이 좀 진정되었다(첫 머리의 호른이 약간 불안한 것 같았지만, 무난하게 넘어갔다). 아름다운 선율을 고음부의 바이올린과 저음부의 첼로가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이 참으로 평온하게 느껴졌다. 연주회장까지 오면서 쌓인 짜증이 씻겨나가는 것 같았다. 이날의 협연자는 바이올리니스트 김현아와 첼리스트 송영훈. 송영훈은 자주 본다.

그리고 3악장. 아마 브람스의 이중협주곡 중 가장 유명하고 사랑받는 악장일 것이다. 시작부터 첼로가 경쾌한 주제 선율을 연주한다. 이것을 곧바로 바이올린이 받고, 이어서 전체 관현악이 포르티시모로 연주하는데, 관객들로부터 최고의 몰입을 이끌어 낸다.

입구에서 공짜로 나눠준 프로그램 북은 공짜인 만큼 허술하기 짝이 없었는데(곡 해설은 책의 것을 그대로 베꼈거나 혹은 개인 일기장에나 적어두는 게 어울릴 만큼 주관적인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그 프로그램 북에 따르면, 이 곡을 작곡할 때 브람스는 솔리스트들의 기량은 고려하지 않은 것 같다고 되어있다. 이 곡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게 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을 텐데, 아마 브람스가 너무 어렵게 곡을 써놔서 마치 당시의 연주자들의 기량이나 한계 따위는 아랑곳 않은 듯 여겨진다고 말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이 곡은 연주에 고도의 기교를 필요로 해서, 솔리스트들 개개인에게 높은 역량이 요구된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뛰어난 연주자들이 워낙 많으니. 이것도 프로그램 북에 적혀있던 내용이지만, 바이올리니스트 김현아는 뉴욕 콘서트 리뷰로부터 “정교하고 화려한 테크닉, 맑고 영롱한 소리, 깊고 넓은 음역, 열정적이면서도 담백한 연주 스타일, 바이올리니스트로 최상의 기량과 미덕을 갖춘 연주자”라는 찬사를 받았다고 되어 있다. 화려한데 정교하고, 열정적이지만 담백하며, 깊은데다가 넓기까지 하다니 대체 이게 무슨 소린가 싶다.

하지만 분명 솔리스트들의 연주는 훌륭했다. 다만 워낙 힘에 넘치는 대곡이고, 또 협주곡을 쓸 때에도 항상 오케스트라 부분을 탄탄하게 작곡해 놓는 브람스라 그런지, 상대적으로 바이올린의 경우에 프로젝션이 조금 부족하게 느껴졌던 건 있다.

이중협주곡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객석에서 휴대폰이 한 차례 울렸다. 그리고 1악장이 끝난 뒤에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연주회장 안에서 휴대폰을 꺼놓아야 된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몰상식한 사람은 없을 테니까, 부주의에 의한 실수라고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다. 악장 사이에 박수는 좀 더 미묘한 문제다. 아마추어 연주회 때에는 별다른 주의가 없으면 십중팔구 악장 사이에 박수가 터져 나온다. 지난 번 삼성필 연주회 때는 브람스 4번 1악장이 끝나자 객석에서 박수가 나오려는 것을 지휘자가 객석을 향해 손을 내저어 제지한 바 있다.

악장 사이에 박수를 치지 않는 것은 하나의 에티켓으로 여겨지지만, 이것은 물론 강제적인 사항은 아니다. 또 어떤 곡들은 정말 마음껏 박수를 쳐보라는 식으로 1악장을 끝맺는다. 가령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1악장이 끝났을 때 박수를 치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는 관객은 별로 없을 것이다. 물론 모든 악장이 연주 될 동안 어떤 감정을 유지하는 것을 방해받지 않을 권리라는 것도 존중되어야 한다고 본다. ‘악장과 악장 사이에 박수를 치는 것은 무식한 행동’이라고 정의 해 버리면 간단히 끝날 일이겠지만, 오페라의 훌륭한 아리아가 끝나면 그 감동을 당장 표현하기 위해 열렬한 박수를 치는 것처럼, 종종 악장 사이에 박수를 치는 것도 허용될 수 있는 게 아닐까.

나는 악장 사이의 박수보다도 이때다 하고 터져 나오는 기침이나, 마지막 악장 마지막 음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도 않았는데 아는 체하고 브라보를 외치는 따위의 행동이 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인터미션 시간에는 로비의 카페에서 치즈 케이크 한 조각과 카페라테를 사서 일단 허기를 달랬다.

오늘 연주회는 브람스 스페셜로 구성되었다. 첫 프로그램인 대학축전서곡은 놓쳐버렸지만, 그렇더라도 이중협주곡과 메인 곡인 브람스 교향곡 4번을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즐거움이다. 특히 오늘 성남시향의 연주로 듣는 브람스 4번에는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나는 국내 시향들의 연주를 직접 들으러 연주회장을 찾은 경험은 별로 없지만, 매일 같이 클래식 연주회 장면을 방송해주는 고마운 Arte TV를 통해 국내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시향들의 연주를 다 감상했다. 이건 나의 솔직한 감상인데, 요즘 국내 오케스트라의 실력은 상당히 뛰어난 것 같다. 과거의 이야기는 잘 모르지만, 듣는 바에 따르면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서울시향조차 오늘날의 영광을 상상할 수 없을 수준이었다고 하는데, 요즘은 정말 많은 오케스트라들이 ‘들을 만한 연주’를 들려준다.

매년 봄이면 전국의 시향들이 총출동하여 ‘교향악 축제’를 여는데, 각 시향들이 서로의 역량을 비교하게 되는 자리이기도 하다. 2003년에 생긴 성남 시향도 지금까지 세 차례 교향악 축제에 참가하였다. 자기 고장에 오케스트라가 있다는 것은 뿌듯하고 즐거운 일이다. 앞으로 애정을 갖고 지켜봐야겠다.

브람스 4번. 브람스의 마지막 교향곡. 전체적인 짜임새도 정말 훌륭하지만, 2악장이 너무나 아름다운 곡. 이 2악장은 시작과 함께 호른과 목관이 주제 선율을 연주해 나간다. 그 사이에 현은 피치카토로 반주를 한다.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와 프로 오케스트라를 비교하면 그 차이점이야 수도 없이 많지만, 가장 두드러지는 것 중 하나는 바로 현악기의 ‘피치카토’다.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에 있어 피치카토는 가장 취약한 부분이다.

만일 ‘시간’을 x축에 놓고, 그 위에 현악기로 연주되는 음의 길이를 표시한다면, 대부분의 경우에는 기다란 선분으로 그려질 것이다. 그러나 피치카토는 시간 축 위에 점을 찍는 것이다. 연주 되는 음의 길이가 충분히 길면, 설령 첫 머리에 연주자들 간에 호흡이 완벽히 일치하지 않더라도, 나중에 자연스럽게 하나의 소리로 모이게 된다. 그러나 피치카토 주법으로 연주 할 때에는 그런 여유가 없다. 한 번 소리가 어긋나면 시간 축 위에 무수한 점이 찍히게 된다. 그러면 정말 참아줄 수 없는 지저분한 소리가 되어버린다.

문제는, 이런 사실을 누구보다도 연주자들 자신이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마추어 연주자라면 누구라도 피치카토 부분에서는 소심해질 수밖에 없다. 자기 혼자 엉뚱한 박자에 소리를 내면, 피치카토 부분에서는 너무 확연히 드러난다. 이런 위험부담을 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결국 지저분한 소리가 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소리가 사라져버린다.

의미 없는 음표는 한 개도 쓰지 않는 브람스다. 반주는 화성을 채워주고, 소리를 두텁게 하며, 긴장감을 유지시켜주고, 주제 선율을 돋보이게 한다. 이 반주가 무너졌을 때, 연주는 맥이 없어지고 흐물흐물 거리며, 무게 중심 없이 그저 부유하게 되어버린다.

탄탄한 소리와 팽팽한 긴장감 끝에 아름다운 현악기의 소리로 주제 선율이 변주되어 연주될 때, 비로소 감상자는 감동으로 살짝 눈시울을 붉힐 수 있는 것이다.

앙코르 곡은 예상했던 대로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이었다. 다행히 5번은 아니고, 1번을 들려줬다. 브람스가 꼭 가을에만 어울리는 작곡가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을이면 브람스의 곡을 많이 찾는 건 분명하다. 이제 겨울을 바라보는 늦가을, 브람스와 함께한 저녁은 즐거웠다.

2009/11/12 05:32 2009/11/12 0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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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음악/음악감상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부는 것이, 벌써 여름은 저만치 물러가고 가을이 가까이 오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브람스에 빠져있다.

 “자유롭지만 고독하다” 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

오늘 소개할 곡은 The Variations on a Theme by Haydn Op. 56a(하이든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 작품 번호 56a)이다. 이 곡은 1873년 여름에 작곡되어 같은 해 11월에 브람스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편성은 2관 편성.

이 곡은 이미 제목만으로도 우리에게 상당히 많은 정보를 제공 해 주고 있다. 우선 곡의 형식이 ‘변주곡’이라는 것. 이 ‘변주곡’이란 단어는 우리에게 상당히 친숙하다. 그런데 변주곡이 대체 무엇이란 말이지?

본래 변주(變奏)란, 어떤 선율을 여러 가지 작곡, 연주 상의 기법을 사용하여 변화시켜 나가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이런 ‘변주’의 방식으로 곡 전체를 구성한 것이 이른바 ‘변주곡’으로, 악곡의 주제 선율을 시종 다양한 기법으로 변주해 나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변주곡은 상당히 자유로운 작곡 형식이다. 기본적으로 변형을 할 원형의 멜로디(주제)가 초두에 제시되는 것은 당연한 약속 같은 것이지만, 이후에 어떤 식으로 몇 번 변주가 이루어질 것인가는 전적으로 작곡가의 개성에 달려있다.

이런 변주곡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명곡들로는 하나의 선율을 무려 30번 변주하여 연주하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기교를 이용한 변주의 진수를 보여주는 파가니니의 ‘카프리스 24번’, 그리고 바로 이 카프리스 24번의 주제 선율을 이용하여 전혀 새롭고 너무나도 아름다운 관현악판 변주를 들려주는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의 주제에 의한 광시곡’, 이름만으로도 사람들의 호기심을 끄는 엘가의 ‘수수께끼 변주곡’ 등이 있다.

브람스 역시 변주곡 형식의 곡들을 남기고 있는데, 오늘 소개할 ‘하이든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은 변주곡 역사에서도 각별한 위치를 지닌 곡이다. 대체로 변주곡은 장대한 심포니나 모음곡 같은 비교적 규모가 큰 악곡의 한 악장으로 작곡되는 것이 통례다. 그런데 ‘하이든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은 변주곡 형식이면서 하나의 독립된 작품으로 작곡된 최초의 관현악곡인 것이다.

사실 이 곡은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곡으로 먼저 작곡되고, 오케스트레이션은 나중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오케스트라 버전이 먼저 공개가 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먼저 작곡된 피아노 버전이 오케스트라 버전에 밀려 작품 번호 56b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제 다시 한 번 곡의 제목으로 돌아가 또 다른 정보를 탐색 해 보자. 곡 초반 2분가량 제시되는 이 근사한 주제 선율이 어디에서 얻어졌을까? 곡의 제목은, 이 주제 선율이 하이든의 작품에서 가져온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선율이 정말 하이든이 작곡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Haydn, Divertimento in B-dur 2nd mov.

하이든의 디베르티멘토 1번으로도 알려진 곡의 2악장이다. ‘Chorale St. Antoni(성 안토니의 성가)’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여기의 멜로디는 분명 브람스가 변주에 사용한 멜로디가 맞다. 그러나 이 곡을 정말 하이든이 썼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며, 오늘날에는 오히려 다른 작곡가의 작품으로 보는 의견이 우세하다.

그러나 설령 이 희유곡을 하이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작곡했다 하더라도, 과연 그 제3의 작곡가가 주제 선율을 작곡했을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성 안토니의 성가’라는 제목이 그런 의혹을 더욱 증폭시키지만, 지금까지는 이 부제와 관련하여 주제 선율의 근원을 밝혀줄 어떤 추가적인 정보도 발견되지 않았다.

여전히 미스터리인 아름다운 주제 선율이 제시된 뒤, 이후 이 주제가 총 8번 변주된 다음, 피날레로 마감한다. 8번에 걸쳐 다양한 시대의 기법들로 폭넓은 변주를 들려주는데, 각각의 변주가 모두 개성 넘치고 아름답다. 개인적으로는 정열적이면서도 유려한 1번 변주가 마음에 들지만, 여러분들의 선택은 어떨지?

본래 하나의 곡으로 쉼 없이 연주되는 이 곡을 변주별로 쪼개서 올린 것은, 각 변주간 구분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사실 통째로 된 파일의 용량이 커서 안 올라간다는 게 결정적인 이유. 대충 보니까 파일 크기가 10메가가 넘어가면 업로드가 안 되는 것 같다. 이건 텍스트큐브 자체에 걸려있는 제한인 걸까? 이래서는 용량 6기가의 서버를 사용하는 의미가 없다. 어떻게 수정이 안 되나.

지휘는 토스카니니.

2009/08/30 05:25 2009/08/30 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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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서재/독서노트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대답은 “예스!”

사강을 좋아하세요?

대답은 “글쎄?”

시몽은 매우 잘생겼지만, 자신의 잘생긴 외모를 거의 의식하지 않는다. 나는 잘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외모가 출중하면서도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다만 이것 하나는 상상이 간다. 그런 캐릭터가 범인들에게 얼마나 매력적으로 다가올 것인가 하는 점 말이다.

시몽은 14살 연상의 여인 폴에게 반한다. 소설의 제목이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인 것, 그리고 시몽과 폴의 나이 차이가 14살인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브람스가 평생 마음속에 품고 살았던 클라라 슈만은, 브람스보다 꼭 14살 나이가 많았다.

스스로 인생에서 해 놓은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고백하는 이 무기력하고 허무적인 청년이, 폴과 만난 이후로는 그녀를 사랑하는 것만이 인생의 유일한 의미이며 인생의 목적인 것처럼 그녀와의 사랑에 매달린다. 이 맹목적인 청년이 운운하는 ‘행복’이란 것에, 나는 반하지 않았다. 비슷한 나이대의 남자이지만, 시몽이라는 캐릭터에 공감하기는 어려웠다.

폴에 대해서는 거의 절망적인 답답함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이 브람스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알지 못 하며, 앞으로도 영영 브람스를 사랑할 기회를 상실 해 버렸다. 그건 그녀가 39살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늙어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되고 싶지 않은, 그렇기 때문에 가장 두려운 ‘늙은’ 모습이다.

“그리고 당신,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이 죽음의 이름으로, 사랑을 스쳐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을 고발합니다. 당신에게는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고독 형을 선고합니다.”

메마른 건초 밭으로 달려드는 불 수레바퀴의 경고장. 오감으로 전해지는 감각은 짜릿짜릿하고 감정은 폭발한다. 모든 것이 불타버리고 난 뒤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그건 ‘사형’도 아니고 ‘고독 형’도 아니다. 다만 재가 남을 뿐…….

소설 속에서 시몽과 폴이 함께 들으러 간 ‘브람스’는, 바이올린 협주곡이었다. 이 곡은 브람스가 생애동안 단 한 곡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이다. 그러나 너무나도 힘차고 아름다워 수많은 거장들의 단골 레퍼토리가 되었고, 오늘날에는 떠들기 좋아하는 대중들의 ‘4대 바이올린 협주곡’이라는 호들갑스러운 리스트에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 곡의 가장 유명한 3악장을 올려본다. 언젠가 There will be blood란 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유전에서 기름이 터져 나오는 순간 이 3악장이 배경 음악으로 쓰였다. 영화의 시종 암울했던 분위기 속에서 이 음악이 마치 태양의 반짝이는 빛처럼 느껴졌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연주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바이올리니스트 셰링.

2009/06/21 20:35 2009/06/21 20: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