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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음악계에 ‘5인조’가 있다면, 프랑스 음악계에는 ‘6인조’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이나 혹은 20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에는 프랑스 6인조가 러시아 5인조만큼 유명해질 수 있을까? 갖은 우연과 거짓말, 어리석음이 판치는 게 인간의 역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한편으로 시간의 심판은 누구에게든 그 업적에 걸맞은 명예를 찾아주거나 반대로 부당하게 누리는 명성을 앗아가 버린다. 아득한 과거의 것임에도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이른바 ‘클래식’이라 분류되는 음악의 멋진 점일 것이다.

Les Six

프랑스 6인조(Les Six)의 사진. 왼쪽부터 타이페르, 플랑크, 오네게르, 미요, 뒤레, 오리크.


오늘 소개할 음악가는 다리우스 미요. 앞서 언급한 프랑스 6인조의 일원이다. 미요는 이 프랑스 6인조의 유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6인조의 구성은 전적으로 우연에 의한 것이다. 오리크, 뒤레, 오네게르, 플랑크, 타이페르 그리고 나는 서로 잘 아는 친구 사이였고, 우연히 한 연주회에 함께 참여하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의 음악적 기질이나 성향은 전혀 달라서, 별로 공통점이 없었다.”

여기서 미요가 언급하는 한 연주회는, 역시 프랑스 출신의 작곡가인 에릭 사티가 주도적으로 기획한 ‘새로운 젊은이들(Nouveaux Jeunes)’이라는 공연이었다. 에릭 사티는 세계 1차 대전 이후 침체된 예술계에 신선한 바람을 몰고 올 요량으로 자기 주위의 젊은 작곡가들을 모아 연주회를 기획하게 되었는데, 이 연주회에 참여한 사람이 바로 미요가 말한, ‘서로 잘 알고 지냈지만 음악적 성향은 달랐던 여섯 명’이었다. 그런데 이 여섯 사람의 연주회가 한 사람의 관심을 끌었다. 문화 비평가였던 앙리 콜레다. 콜레는 프랑스 출신의 젊은 음악가 6인의 조합을 보고 즉각적으로 러시아 5인조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가 글을 기고하던 신문인 <코메디아>에 ‘6인조(Les Six)’라는 호칭과 함께 비평을 실었다. 이후로 이 젊은 작곡가들의 모임은 ‘6인조’로 이름 지어졌다.

그러나 미요 스스로가 밝히고 있는 것처럼, 프랑스의 6인조에게는 러시아의 5인조에게 있었던 ‘민족주의’와 같은 강력한 지향점이 없었다. 20세기는 역사상 그 어느 시기보다도 예술계에 다양한 ‘주의’가 쏟아져 나온 시대였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재능 있는 예술가들을 한데 묶을 지배적인 정신이 상실된 것을 의미했다.

프랑스 6인조의 음악 사조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은 장 콕토였다. 그러나 콕토부터가 모든 예술의 영역에 남김없이 도전한 왕성한 행동주의자요, 모든 새로운 시도를 지지하는 아방가르드 예술가인 동시에, 은밀하게 과거의 질서와 운명론, 신비주의를 추종하는 낭만파이기도 했다. 이렇게 일관성이 결여된 인물을 6인조가 추종했던 것을 보면, 6인조는 함께 무언가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어 했지만, 정작 무엇을 하면 좋을지는 몰랐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이 6인조는, 개성 넘치는 여섯 작곡가들의 사교모임 이상의 그 무엇이 되지는 못 했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러시아 5인조 모두의 곡을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곡을 쓴 미요 같은 인물이 포함되어 있음에도, 프랑스 6인조가 러시아 5인조의 명성을 뛰어넘지 못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D. Milhaud

Darius Milhaud(1892-1974)



다리우스 미요는 재능 있는 작곡가였다. 이 말은, 샘솟는 영감의 원천과 더불어 아이디어에 형태를 부여할 수 있는 구성의 능력과 자신의 음악적 사상을 구축할 수 있는 논리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야말로 미요는 ‘고개를 까딱하면 음악이 쏟아져 나오는’ 부류의 작곡가였다.

20세기의 작곡가답게 그는 새로운 것도 열심히 추구했다. 그중 하나는 다조(多調:polytonality)형식이다. 다조형식이란 여러 성부를 서로 다른 조성으로 작곡하는 방식을 말한다. 이런 기법은 사실 과거에도 종종 사용된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가령 모차르트가 ‘음악의 유희(Musical Joke)’에서 사용한 것처럼 의도적으로 우스꽝스럽거나 기괴한 인상을 주기 위해 도입한 변칙적 시도가 대부분이었다. 미요는 다조성 음악을 진지하게 연구하고 양식화를 시도한 작곡가로, 그의 곡 ‘프로메테우스’에는 무려 12개의 조가 동시에 연주되는 부분이 등장하기도 한다.

미요가 관심을 가진 또 다른 분야는 바로 재즈였다. 이것이야 말로 오늘 소개할 곡과 관련이 깊다. 미요는 1920년, 런던에서 빌리 아놀드의 밴드가 연주하는 것을 들었는데, 이것이 재즈와의 첫 조우였다. 2년 후인 1922년에 미요는 뉴욕으로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재즈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는 저녁이면 할렘을 전전하며 여러 흑인 음악가들의 재즈 음악을 들었다. 미요는 재즈 음악에 과거 아프리카 대륙에서 강제로 끌려와 노예 생활을 강요당했던 흑인들의 민족음악이 녹아있으며, 또 삶의 애환과 슬픔이 담겨있다고 생각했다. 여행을 마치고 귀국할 때에도 그는 재즈 음반을 구입해 가져왔고, 재즈를 직접 연주하는 등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그에게 곡 의뢰가 들어왔다. 스웨덴의 발레단인 발레 쉬에두아(Ballet Suedois)의 단장, 롤프 드 마레(Rolf de Mare)가 미요에게 새로운 발레곡을 의뢰한 것이다. 그 주제는 ‘천지창조’였다.

‘천지창조’라고 하면 으레 이미 하이든이라고 하는 대작곡가에 의해 음악화 된 바 있으며, 성서의 ‘창세기’ 첫 부분을 장식하는 장대한 신화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미요가 받은 시나리오는, 기독교 문명에 뿌리를 둔 거의 모든 서양의 예술가들을 자극했던 성서의 ‘천지창조’가 아니었다. 그것은 기독교 문명과는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진 아프리카의 신화였던 것이다. 블레즈 상드라스가 집필한 시나리오에는 아프리카의 세 신(神)이 만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역동적인 장면과 남자와 여자가 탄생하여 사랑을 나누는 감미로운 장면들이 녹아들어 있었다. 이는 과거 스트라빈스키가 곡을 쓴 ‘봄의 제전’에서처럼 폭력과 야만으로 얼룩진 이민족/원시 신화와는 성격이 전혀 다른 것이었다.

미요는 무릎을 쳤다. 아프리카 민족의 신화를 묘사하는 데에는, 그 어떤 음악 형식보다도 재즈가 적합할 터였다. 미요는 그동안 재즈 연구에 몰두하며 얻은 성과를 작품화 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것이다. 곧 작곡에 착수했다.

미요는 이 곡을 쓰면서, 재즈의 요소를 클래식 뼈대 안에다가 어설프게 우겨넣을 것이 아니라, 정말 재즈의 스타일을 충실히 살린 곡을 쓰고자 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선율이나 리듬만을 채용하는 것을 넘어서 악기의 편성도 과감하게 구성했다. 현은 기본 콰르텟 구성에서 비올라를 색소폰으로 대체했고, 타악기는 탬버린, 탐탐, 사이드 드럼 등 무려 9개를 포함시켰다. 클래식과 재즈의 완벽한 융합을 이루어 낸 이 곡은 1923년 10월 25일에 초연되었는데, 이는 비슷한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조지 거슈인의 대표작 ‘랩소디 인 블루’보다 1년가량이나 앞선 것이다.

전체 연주 시간이 약 16분 남짓인 이 곡은 총 여섯 개의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La creation du monde, Op. 81a

1. Overture(00:00~)

시작은 색소폰이 긴 호흡으로 연주하는 레가토 선율이다. 어딘가 공허하고 텅 비어있는 느낌이다. 세 신(神)들이 등장하기 이전, 공백의 상태를 암시하는 것 같다.

2. The Chaos before Creation(03:56~)

기나긴 공허의 끝에, 피아노와 드럼이 등장하면서 마치 때리는 듯 강렬한 리듬을 연주한다. 그 위로 베이스와 금관(트럼펫, 색소폰, 트럼본)이 재즈 선율을 푸가로 연주하는데, 자유분방한 선율이 서로 다른 악기를 통해 대위법적으로 반복되는 이 독특한 느낌은 창조를 담당하는 아프리카의 세 신을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다. 마치 본격적인 창조의 행위에 돌입하기 전, 의식 행위로 자유로운 춤을 추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3. The slowly lifting darkness, the creation of trees, plants, insects, birds and beasts(05:26~)

요란스럽던 광분이 갑자기 잦아든다. 음악은 다시 서곡의 선율을 반복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공허와 어둠이 오래 지속되지 않고 서서히 걷힌다. 플루트에게서 선율을 건네받은 오보에가 느릿느릿 연주하며 서서히 생명이 깨어나는 것을 묘사한다(07:00~). 플루트의 지저귀는 듯한 소리가 약간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데, 곧 지극한 환희를 맞이하기 위한 암시이다.

4. Man and woman created(08:49~)

드디어 인간이 탄생했다. 남자와 여자는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살피고, 움직이며 호기심을 충족하고 기쁨을 만끽한다. 바순의 다소 익살스러운 리듬 위에 얹어지는 두 바이올린의 경쾌한 선율이 인상적이다. 분위기는 점차 역동적으로 고조된다.

5. The desire of man and woman(09:52~)

이윽고 남자와 여자는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고, 사랑의 욕구를 느끼게 된다. 막 몸을 움직이게 되었을 때의 흥분을 묘사하던 떠들썩한 분위기는 가라앉고, 두 사람의 감정을 따라 현이 연주하는 감미로운 선율이 흐른다. 이어서 기교적인 클라리넷 연주가 이어진다.

6. The man and woman kiss(11:40~)

색소폰의 등장과 함께 음악은 다시 오프닝의 느린 선율로 돌아가지만, 이번에는 공허와 어둠 대신 빛과 희망으로 가득 차있다. 음악은 이제 각 파트의 주제들을 다시 한 번 재현하며 떠들썩한 분위기를 몰고 오고, 창조와 사랑의 완성 속에서 완만하게 사그라진다.

2011/07/27 03:08 2011/07/27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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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년 만에 다시 찍은 책상 위 모습. 크게 달라진 건 없다.>

나의 오디오 시스템에 대해 이야기 해 볼까 한다. 아니, 사실 오디오 시스템이라고 부를 만한 것도 없다. 이게 내 책상이자, 오디오 시스템의 실체. 보다시피 재생기기는 노트북이다. LG의 Xnote LS45 모델. 2005년도 9월 무렵에 구입했으니까, 벌써 4년 이상 된 녀석이다. 그래도 구입 당시에 성능 조금은 받쳐주는 걸로 고른 덕에, 아직까지는 별 무리 없이 돌리고 있다. 하기야 내가 고사양 게임을 하는 것도 아니요, 그래픽 작업을 하는 것도 아니니, 컴퓨터 사양 탈일은 별로 없다.

스펙을 보면 사운드 칩 사양이 HD sound 24bit라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Sandra로 정보를 보면…….


Maximum Standard Sampling Bits: 16-bit!!!

아무튼 오늘의 이야기 주제는 사실 노트북이 아니고 스피커다. 부드러운 곡선 처리가 된 투명한 바디와 그 바디를 투과하여 은은히 비추는 블루 라이트가 포인트인 이 미려한 자태의 스피커는 바로 harman/cardon의 Soundstick2이다.

구입 시기는 작년 11월 하순쯤. 10월 중순부터 구입하려고 가게 여러 곳에 전화 문의를 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국내 시장에 일시적으로 물건이 사라져서 구입까지 몇 주를 기다려야 했다. 스피커가 도착한 첫 날, 음악만 8시간 정도 들었던 것 같다.

Soundstick2를 고른 이유는 단 한 가지, 빼어난 디자인이다. 어느 날 우연히 이 스피커를 보게 된 이후부터는 다른 스피커들은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성능에 대한 고려는 애초에 2순위로 밀려나버렸지만, harman/cardon은 저 유명한 JBL의 모회사이며, 독일 유수의 카 메이커들이 생산하는 자동차의 오디오 시스템을 담당하는 회사이기 때문에 소리 면에서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음악 감상 목적에 2.1 채널은 허세에 불과하다는 등의 기능적인 논의는 가볍게 묵살시킬 만큼, 이 스피커의 외관이 선사하는 심미적 만족도는 절대적이었다. 더 나은 소리를 위해서라면 우퍼를 바닥에 내려놓아야겠지만, 아직까지 소리의 질에서 심미적 만족을 구할 정도의 내공을 갖지 못 한 나는 외관의 아름다움을 계속 즐기기 위해 구태여 우퍼를 책상 위에 놓고 있다.

이따금 방안 가득 소리가 울려 퍼질 정도로 음악을 크게 틀어놓는다. 이 스피커가 그런 용도에 적합한가는 논외로 치고, 때로 음악은 그렇게 들어야 한다. 또 음악은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다. 고급 음향설비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품기 보다는, 약간의 부족함을 상상력으로 메우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게 중요하다. 연주회를 다니며 생음악도 들어봐야 악기의 본래 소리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직접 연주를 해 본다면 금상첨화다. 그런 경험이 감상을 완성한다. 물론 고급 오디오 시스템은 구경도 못 해본 나니까 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아무튼 나처럼 컴퓨터를 재생기기로 쓰는 개인 사용자들에게 Soundstick2는 디자인 면에서나 성능 면에서나 최고의 만족도를 선사하는 명품 스피커임에 틀림없다. 그저 책상 위를 차지하고 있는 당당한 모습만 보더라도 흐뭇해지는 기특한 녀석이다.

정보 제공을 목적으로 쓰는 글이 아니니까, 스피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 찾아보면 전문적인 리뷰 같은 것들도 얼마든지 나오니까 관심 있으면 직접 검색 해 보시길.

음, 다음에는 이 스피커보다 함께한 지 훨씬 오래되었고, Soundstick2를 들여놓은 이후에도 여전히 자주 사용하고 있는 오래된 동반자 AKG의 K240 Monitor 헤드폰(사진 좌하단에 보이는 커다란 헤드폰!)에 대해, 심심하면 써보도록 하겠다.

2009/10/13 04:43 2009/10/13 04: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