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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잘 벌어오는 가장에게는 무슨 일을 하는지 묻지 않는다.” 삼성 같은 대기업들을 보면 드는 생각이다. 나는 조중동 같은 휴지에 사설이나 내는 부류의 인간들이 언급하기 좋아하는 ‘좌파적 사고에 물든 인간’도 아니고, 홀로 정의를 부르짖는 도덕론자도 아니다. 다만 눈뜬장님은 아닐 따름이다. 일개 기업의 부도덕, 부정(不正)에 대해 분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누구 한 사람 감히 직언할 수 없고, 점차 그것을 직시하려 하는 사람조차 사라져가는 무거운 현실은 나를 화나게 한다.

신화란, 과거를 현재의 입맛에 맞게 날조해버린 것이다. 찬란한 위광을 바라보며 ‘조금 더, 조금 더’를 외치며 걸어가는 사이, 우리의 눈은 완전히 멀어버리게 된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일평생을 위기의식 속에 살아가야 하는 대한민국에서, 이 모순된 사회의 정점에 서서 위기의식을 늘 조장하는 장본인들이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둥 ‘사람을 향합니다.’라는 둥 떠드는 꼴을 보면, 비위가 상한다.

대기업의 횡포가 무엇인지, 우리는 아직 알려고만 하면 얼마든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여하한 이유에서건 그것을 알기를 포기할 때에, 오욕의 과거를 깨끗이 포장해 반들반들한 현재로 만들어버린 그들에게 결국 미래까지 내어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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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에서는 취미 생활도 단순한 취미 생활일 수 없는 모양이다. 삼성필의 연주는, ‘백혈병 아동 돕기 자선 연주회’를 표방하고 있었다. 좋은 일은 좋은 일이니, 여기에 토를 달 생각은 없다. 독기 어린 얼굴로 악착 같이 투쟁과 혁신을 외치며, 이마트로 유통망을 장악하고는 PB 제품을 남발하여 제조회사의 목을 옥죌 때, 백혈병 아동을 자식으로 둔 가장은 실직을 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별개의 문제다.

삼성필은 삼성 임직원들이 모여 만든 아마추어 오케스트라다. 이것을 창단한 사람이 유포니아 출신의 선배라고 한다. 그래서 삼성필이 연주를 할 때면 으레 초대권이 날아오곤 하는 모양이다. 동아리 후배 녀석이 같이 가자는 제의를 해주어서 가기로 했다. 비록 내가 지금까지 아마추어들의 연주 무대를 꽤 여럿 보러 다니긴 했지만, 그게 취미인 사람은 아니다. 아마추어들의 열정이야 높이 사고, 나 역시 아마추어 음악인으로서 자극을 받는 게 사실이지만, 단적으로 말해서 아마추어들에게 음악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 대단하다는 삼성 그룹의 오케스트라이지만, 유포니아와의 인연이 아니었더라면 일부러 갈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연주 장소가 세종문화회관이었다. 오랜만에 광화문으로 나갔다. 시간이 조금 남아서, 교보문고에 들러 명곡해설라이브러리 시리즈의 브람스 편과 무라카미 하루키 ‘1Q84’ 일어판을 구입했다. 책값만 8만원 가까이 나와서 그동안 모아둔 적립금을 사용하기로 했다. 저녁 식사 전이었기 때문에, 간단히 햄버거라도 하나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버거킹이 있는 쪽 출구로 나가려는데, 출구 바깥에서부터 교보문고 안으로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오늘 무슨 작가의 사인회가 있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저마다 품에 끼고 있는 책을 힐끗 보았는데, ‘보통의 존재’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다.

출구로 빠져나오니, 풍경이 낯설었다. 버거킹이 있어야 할 자리는 흉하게 뜯겨나가 있었다. 없어져버린 것이다. 교보문고에 오면 으레 들르는 곳이었는데.

이러는 사이 시간이 촉박해졌다. 뭐라도 먹어야겠기에 세종문화회관 옆 골목에 있는 KFC에서 세트 메뉴 하나를 주문해 허겁지겁 먹고 대극장으로 향했다. 거기서 네댓 명 되는 일행과 만났다. 화장실에 먼저 들렀다가, 연주회장으로 들어갔다. 세종홀에 처음 온 한 사람은, 홀안 여기저기를 사진으로 찍어 남기느라 바빴다. 생각해보면 나도 작년 서울시향의 마스터피스 연주회 이후로 세종홀을 찾는 게 처음이다.

선배들이 보내준 초대권의 자리는 꽤 괜찮았다. 상당히 앞쪽 자리라, 관 파트를 보는 것은 어려웠지만, 대신 협연할 솔리스트는 가까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첫 곡은 스메타나의 교향시 모음곡 ‘나의 조국’ 중에서 두 번째 곡인 ‘몰다우 강’이었다. 너무나 유명한 곡이지만, 연주하기가 쉽지는 않다. 사실 이 곡의 핵심은 다소 유치한 느낌마저 드는, 귀에 착 감기는 주선율이 아니라, 짧게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 반주다. 바로 이 반주가 몰다우 강의 넘실거리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강의 넘실거림을 표현한 스케일은 어느 한 파트가 단독으로 맡지 않는다. 때로는 저음 악기에서 고음 악기로, 다시 고음 악기에서 저음 악기로 건네주며, 시각적으로도 강물의 넘실거림을 완벽히 표현한다. 그리고 당연한 얘기지만, 아마추어에게는 이런 주고받기가 쥐약이다. 강물의 유려한 넘실거림이라기보다는, 얼마 전 서울국제아트페어에서 본, 모터를 돌려 억지로 표정을 바꾸는 모택동 초상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두 번째 곡은 차이코프스키의 ‘로코코 주제에 의한 변주곡’이었다. 3악장 구성의 정통 첼로 협주곡은 아니지만, 단순한 소품 취급하기에는 규모가 상당한 곡이며, 첼로 협주곡 레퍼토리로 꽤 인기가 많다. 개인적으로는 그리 좋아하는 곡은 아니다. 나 역시 일반 대중들과 비슷한 입맛을 가지고 있다. 첼로 협주곡으로는 드보르작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엘가의 협주곡 1악장을 좋아하며, 경쾌한 하이든도 멋지다고 생각한다. 차이코프스키의 ‘로코코 주제에 의한 변주곡’은 그러나 어딘가 변주가 밋밋한 느낌이다. 어쩌면 주제 선율이 너무 단조로워서일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탁월했던 차이코프스키이지만, 변주는 그의 장기가 아니었던 것 같다.

협연한 첼리스트는 ‘송영훈’으로, 국내에서는 물론 해외에서도 상당히 인정받는 대단한 실력자이다. 이런 사람을 섭외한 것도 삼성이니까 가능했던 것이겠지만, 굳이 이런 스타를 불어와야 할 필요가 있었나 싶기도 하다. 탁월한 솔리스트와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의 결합은 반드시 절름발이를 낳게 되어있다. 유포니아도 바로 얼마 전에 대단한 교수님들을 모시고 연주회를 했으니까 경험을 바탕으로 할 수 있는 얘기지만, 오케스트라는 두 가지 생각을 품게 된다. 첫째는 솔리스트에게 적당히 묻어가지는 것이고, 둘째는 솔리스트에게 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솔리스트에게 묻어갈 생각을 버리고 당당히 ‘협연’을 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솔리스트에게 ‘폐’가 안 되는 것은 당연하다. 솔리스트만 너무 부각된 나머지, 차라리 독주곡을 연주하는 게 나았을 뻔했다.

이날의 메인 곡 브람스 4번은, 처참했다. 내가 사랑하는 브람스의 교향곡이 이렇게 처참하게 망가지는 꼴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미어질 지경이었다. 내 옆의 두 사람은 브람스의 4번을 오늘 처음 들었다는데, 이들이 이런 엉망진창의 연주로 브람스를 접했다는 게 너무 안타까웠다.

이미 1악장의 제1 주제부터 엉클어지기 시작했다. 음정이 안 맞는 거야 둘째 치더라도, 오케스트라의 호흡이라는 게 실종된 듯 보였다. 제1 바이올린과 제2 바이올린의 유니즌으로 강한 표정이 살아나야 할 부분에서는 그저 얼이 빠져있었다. 관악기들은 조율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지, 아주 듣기가 괴로웠다. 클라리넷은 악기가 망가졌거나 아니면 연주자가 신종플루에라도 걸린 것 같았다. 뽀글거리는 파마머리를 하고 나온 악장은, 그저 나이가 많아 그 자리에 앉았다는 게 확실 해 보였다. 오케스트라를 리드하기는커녕, 옆 사람 쫓아가는 게 고작이었다. 실수는 또 왜 그렇게 잦은지. 감동의 떨림이 느껴져야 할 2악장에서는 창자가 내려앉는 것 같았고, 아마추어 오케스트라답게 허용된 템포 안에서 가장 느리게 연주한 3악장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목에 생선 가시가 걸린 듯한 답답함을 선사했다. 4악장의 피날레에 이르렀을 때, 언제나 특유의 치밀함으로 바닥부터 견고하게 쌓아와 클라이맥스를 들려주는 브람스의 교향곡은 간데없어, 왜 피날레가 지금 나오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마추어들은 자신들의 열정을 과대평가 하는 경향이 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시간을 내서 두어 시간 연습하면 그게 자신에겐 최선의 노력이라고 생각하고, 연주 무대에 서면 그 노력의 값어치를 사람들이 다 알아 줄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 진지한 표정, 자못 자랑스럽다는 태도와 어설픈 연주의 부조화를 보며, 관객은 이게 장난하자는 건지 한 번 제대로 해보자는 건지 알 수 없게 된다.

앙코르 곡으로 피아졸라의 ‘리베르탱고’를 연주했는데, 첼리스트 송영훈이 다시 나왔다. 이 대스타가, 구원투수가 아니라 패전처리 투수 역할을 맡았다.

백혈병 아동 돕기 성금 전달식을 하고, 마지막으로 오케스트라는 관객들 앞에서 삼성의 사가(社歌)를 연주했다. 단언하건데, 이 날의 연주 중 가장 훌륭한 연주였다.

이들의 연주는, 아마추어의 열정을 보여준다기보다는, 아마추어의 열정을 조롱하는 것 같았다. 엄청난 돈을 들여 대스타를 솔리스트로 부르고, 세종문화회관 같은 최고의 홀을 섭외하고, 백혈병 환우 돕기라는 공익적 가치를 내걸고,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초대장으로 불러와 떠들썩한 자리를 마련했지만 정작 연주에는 내실이 없고, 진심으로 노력한 티도 나지 않았다. 겉만 번지르르할 뿐이었고, 우리 삼성맨들은 노예 부림 같은 생활 속에서도 음악에 대한 관심의 끊은 놓지 않고 있다고 애처로이 항변하는 듯했다. 음악을 즐기고 싶으면, 겉치장부터 뜯어버리라고 충고해주고 싶었다. 이들이 입은 겉옷은 삼성이라는 이름으로 빌려 입은 것이지, 연주에 대한 열정이나 실력을 갖춰 입은 게 아니다. 한 마디로 겉멋 부릴 자격이 안 된다는 것이다.

연주회 끝나고 신촌으로 가, 며칠 후면 군입대하는 전임 회장 송별연에 잠깐 얼굴을 비추고 맥주 두어 잔을 급히 비운 후, 나는 돌아왔다.

2009/11/09 16:11 2009/11/09 1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