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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권유(學問のすゝめ). 짐짓 점잔을 뺀 듯 근엄함마저 느껴지는 제목이지만, 그 의미는 결국 공부 좀 하라라는 것이 아닌가. 지난 2015년에 개봉한 영화 사도에서 극중 인물 영조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은 이 나라는 공부가 국시(國是)”라는 대사 한 마디가 여전히 관객들의 가슴에 묵직한 공명을 일으켰던 우리나라의 현실을 상기해보면, “공부 좀 하라라는 타이름은 어쩌면 한국의 청년들에겐 귀에 못이 박히도록 자주 들어온 잔소리이지 않을까.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약 150년 전, 누군가에게 공부 좀 하라라고 당당히 외칠 수 있을 만큼 자신만만했던 한 일본인 학자에 따르면, 당시 일본 전체의 인구 중 160명에 한 명 꼴로 자신의 이 근엄한 잔소리를 자청해서 들었다고 한다.공부를 해야 한다.”라는 충고가 마치 법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라는 말처럼 너무나도 당연하고 또 진부해서 별다른 신선함을 느끼게 하지 못 하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제법 충격적인 이야기다. 필시 당시의 일본 국민들과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의 사이에는, ‘학문권장하는 일갈이 마치 새 시대의 도래를 상징하는 세찬 조류(潮流)처럼 가슴 속으로 밀려들어가게 만든 시대적인 맥락이 존재하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 맥락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학문의 권유라는 책의 안과 밖, 모두에서 찾아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선 학문의 권유의라는 제목은, 그 자체로 여러 가지 질문 거리를 떠올리게 한다. 첫 번째로, 후쿠자와 유키치가 권장하는 학문(學問)’이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이다. 단순히 널리 배우고(博學) 깊이 질문하는(審問) 삶의 자세를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특정한 분야의 지식을 축적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만약 후자라면, 그것은 중국에서 전래된 유학(儒學)인가, 혹은 일본 고유의 국학(國學)인가, 아니면 전혀 새로운 어떤 학문인가? 후쿠자와 유키치는 학문의 대상을 인간 보통 일용에 가까운 실학(實學)’이라고 못 박았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읽고 쓰고 셈하는 것과, 지리학구리학(究理學)역사학경제학수신학이다. 그런데 이들 학문을 하는데, 어느 것이나 서양(西洋)의 번역서를 조사해야 한다고 하였으니, 각 분야의 제목은 한자로 적혀있으나 그 내용은 서양의 학문을 의미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후쿠자와 유키치가 말하는 진정한 학문이요, 한학(漢學)과 같은 전통의 학문은 일용에서 멀어진 우활(迂闊)한 것들이니, “우선은 다음으로 미루어두어야 할 것들이다.

두 번째는 과연 학문을 누구에게 권유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라는 감동적인 문구로써 학문의 권유의 초편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실학(實學)사람 된 자는 귀천과 상하의 구별 없이 모두 다 지녀야 할 마음가짐이라고 하며, 신분에 관계없이 모두가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 글의 내용에 따르면 학문 권장의 대상(바꿔 할하면 학문을 수행해야 할 주체)은 모든 인민(人民)이다. 그런데 이 글이 본래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자신의 고향인 나카츠(현재 오이타현[大分県] 나카츠시[中津市])에 개교한 학교의 학생들과 교원들에게 읽히기 위해서 메이지 412(18721~2)에 쓴 글이라는 점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학문의 주체를 단지 일부의 지배계층으로 한정하지 않고 국민 전체로 외연을 넓힌 것은, 불과 50년 전인 분세이(文政) 8(1825) 아이자와 세이시사이(会沢正志斎)가 자신의 대표작인 신론(新論)에서 백성들로 하여금 따르게 해야지, 알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했던 것과 비교하면 혁명에 가까운 생각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결국 사농공상 각자가 그 직분을 다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여전히 사람에게는 저마다에게 주어진 역할이 따로 있고, 그 역할에 따라 분수에 맞게끔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닌가. 하늘이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지만, 메이지 시대의 일본은 배워서 그 직을 능히 수행할 수 있는 자가 아니라, ‘만세일계의 천황이 통치하는 나라가 아니었던가. 과연 후쿠자와 유키치는, 누구나 실용의 학문만 익히면 신분의 고하(高下) 없이 평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다고 진심으로 호소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세상에 무지문맹한 백성만큼 가련하고 또 미워할 만한 사람”(p.12)이 없으니, “정부는 그 정사를 베풀기를 쉽게하는 통치의 편의와 국가의 부강을 위해서는 백성들을 적당히깨우칠 필요가 있다는 것인가?

마지막 질문은, 저자가 생각하는 학문, 저자가 상정한 대상에게 권유하는 이유이다. 다시 말하면, 후쿠자와 유키치는 왜 이 책을 썼는가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권하는 학문도, 호로지 그 한 가지 일로써 취지로 삼고”(p.14)있는 그 한 가지는 바로 전국의 대평(大平)을 지키려고 하는 것”(p.14)이라고 명백하게 밝히고 있지만, 그렇다면 당시 일본은, 국민이 무지한 까닭으로 대평을 상실하였단 말인가? 후쿠자와 유키치가 주장하는 실용의 학문을 국민들이 익히기만 하면, 국가의 부강과 어진 정치가 실현되고, 대평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일까? 그의 웅변은 자못 심금을 울리지만, 그의 주장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논리는 앞으로 꼼꼼히 점검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2016/10/04 08:10 2016/10/04 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