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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음악계에 ‘5인조’가 있다면, 프랑스 음악계에는 ‘6인조’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이나 혹은 20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에는 프랑스 6인조가 러시아 5인조만큼 유명해질 수 있을까? 갖은 우연과 거짓말, 어리석음이 판치는 게 인간의 역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한편으로 시간의 심판은 누구에게든 그 업적에 걸맞은 명예를 찾아주거나 반대로 부당하게 누리는 명성을 앗아가 버린다. 아득한 과거의 것임에도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이른바 ‘클래식’이라 분류되는 음악의 멋진 점일 것이다.

Les Six

프랑스 6인조(Les Six)의 사진. 왼쪽부터 타이페르, 플랑크, 오네게르, 미요, 뒤레, 오리크.


오늘 소개할 음악가는 다리우스 미요. 앞서 언급한 프랑스 6인조의 일원이다. 미요는 이 프랑스 6인조의 유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6인조의 구성은 전적으로 우연에 의한 것이다. 오리크, 뒤레, 오네게르, 플랑크, 타이페르 그리고 나는 서로 잘 아는 친구 사이였고, 우연히 한 연주회에 함께 참여하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의 음악적 기질이나 성향은 전혀 달라서, 별로 공통점이 없었다.”

여기서 미요가 언급하는 한 연주회는, 역시 프랑스 출신의 작곡가인 에릭 사티가 주도적으로 기획한 ‘새로운 젊은이들(Nouveaux Jeunes)’이라는 공연이었다. 에릭 사티는 세계 1차 대전 이후 침체된 예술계에 신선한 바람을 몰고 올 요량으로 자기 주위의 젊은 작곡가들을 모아 연주회를 기획하게 되었는데, 이 연주회에 참여한 사람이 바로 미요가 말한, ‘서로 잘 알고 지냈지만 음악적 성향은 달랐던 여섯 명’이었다. 그런데 이 여섯 사람의 연주회가 한 사람의 관심을 끌었다. 문화 비평가였던 앙리 콜레다. 콜레는 프랑스 출신의 젊은 음악가 6인의 조합을 보고 즉각적으로 러시아 5인조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가 글을 기고하던 신문인 <코메디아>에 ‘6인조(Les Six)’라는 호칭과 함께 비평을 실었다. 이후로 이 젊은 작곡가들의 모임은 ‘6인조’로 이름 지어졌다.

그러나 미요 스스로가 밝히고 있는 것처럼, 프랑스의 6인조에게는 러시아의 5인조에게 있었던 ‘민족주의’와 같은 강력한 지향점이 없었다. 20세기는 역사상 그 어느 시기보다도 예술계에 다양한 ‘주의’가 쏟아져 나온 시대였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재능 있는 예술가들을 한데 묶을 지배적인 정신이 상실된 것을 의미했다.

프랑스 6인조의 음악 사조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은 장 콕토였다. 그러나 콕토부터가 모든 예술의 영역에 남김없이 도전한 왕성한 행동주의자요, 모든 새로운 시도를 지지하는 아방가르드 예술가인 동시에, 은밀하게 과거의 질서와 운명론, 신비주의를 추종하는 낭만파이기도 했다. 이렇게 일관성이 결여된 인물을 6인조가 추종했던 것을 보면, 6인조는 함께 무언가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어 했지만, 정작 무엇을 하면 좋을지는 몰랐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이 6인조는, 개성 넘치는 여섯 작곡가들의 사교모임 이상의 그 무엇이 되지는 못 했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러시아 5인조 모두의 곡을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곡을 쓴 미요 같은 인물이 포함되어 있음에도, 프랑스 6인조가 러시아 5인조의 명성을 뛰어넘지 못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D. Milhaud

Darius Milhaud(1892-1974)



다리우스 미요는 재능 있는 작곡가였다. 이 말은, 샘솟는 영감의 원천과 더불어 아이디어에 형태를 부여할 수 있는 구성의 능력과 자신의 음악적 사상을 구축할 수 있는 논리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야말로 미요는 ‘고개를 까딱하면 음악이 쏟아져 나오는’ 부류의 작곡가였다.

20세기의 작곡가답게 그는 새로운 것도 열심히 추구했다. 그중 하나는 다조(多調:polytonality)형식이다. 다조형식이란 여러 성부를 서로 다른 조성으로 작곡하는 방식을 말한다. 이런 기법은 사실 과거에도 종종 사용된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가령 모차르트가 ‘음악의 유희(Musical Joke)’에서 사용한 것처럼 의도적으로 우스꽝스럽거나 기괴한 인상을 주기 위해 도입한 변칙적 시도가 대부분이었다. 미요는 다조성 음악을 진지하게 연구하고 양식화를 시도한 작곡가로, 그의 곡 ‘프로메테우스’에는 무려 12개의 조가 동시에 연주되는 부분이 등장하기도 한다.

미요가 관심을 가진 또 다른 분야는 바로 재즈였다. 이것이야 말로 오늘 소개할 곡과 관련이 깊다. 미요는 1920년, 런던에서 빌리 아놀드의 밴드가 연주하는 것을 들었는데, 이것이 재즈와의 첫 조우였다. 2년 후인 1922년에 미요는 뉴욕으로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재즈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는 저녁이면 할렘을 전전하며 여러 흑인 음악가들의 재즈 음악을 들었다. 미요는 재즈 음악에 과거 아프리카 대륙에서 강제로 끌려와 노예 생활을 강요당했던 흑인들의 민족음악이 녹아있으며, 또 삶의 애환과 슬픔이 담겨있다고 생각했다. 여행을 마치고 귀국할 때에도 그는 재즈 음반을 구입해 가져왔고, 재즈를 직접 연주하는 등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그에게 곡 의뢰가 들어왔다. 스웨덴의 발레단인 발레 쉬에두아(Ballet Suedois)의 단장, 롤프 드 마레(Rolf de Mare)가 미요에게 새로운 발레곡을 의뢰한 것이다. 그 주제는 ‘천지창조’였다.

‘천지창조’라고 하면 으레 이미 하이든이라고 하는 대작곡가에 의해 음악화 된 바 있으며, 성서의 ‘창세기’ 첫 부분을 장식하는 장대한 신화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미요가 받은 시나리오는, 기독교 문명에 뿌리를 둔 거의 모든 서양의 예술가들을 자극했던 성서의 ‘천지창조’가 아니었다. 그것은 기독교 문명과는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진 아프리카의 신화였던 것이다. 블레즈 상드라스가 집필한 시나리오에는 아프리카의 세 신(神)이 만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역동적인 장면과 남자와 여자가 탄생하여 사랑을 나누는 감미로운 장면들이 녹아들어 있었다. 이는 과거 스트라빈스키가 곡을 쓴 ‘봄의 제전’에서처럼 폭력과 야만으로 얼룩진 이민족/원시 신화와는 성격이 전혀 다른 것이었다.

미요는 무릎을 쳤다. 아프리카 민족의 신화를 묘사하는 데에는, 그 어떤 음악 형식보다도 재즈가 적합할 터였다. 미요는 그동안 재즈 연구에 몰두하며 얻은 성과를 작품화 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것이다. 곧 작곡에 착수했다.

미요는 이 곡을 쓰면서, 재즈의 요소를 클래식 뼈대 안에다가 어설프게 우겨넣을 것이 아니라, 정말 재즈의 스타일을 충실히 살린 곡을 쓰고자 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선율이나 리듬만을 채용하는 것을 넘어서 악기의 편성도 과감하게 구성했다. 현은 기본 콰르텟 구성에서 비올라를 색소폰으로 대체했고, 타악기는 탬버린, 탐탐, 사이드 드럼 등 무려 9개를 포함시켰다. 클래식과 재즈의 완벽한 융합을 이루어 낸 이 곡은 1923년 10월 25일에 초연되었는데, 이는 비슷한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조지 거슈인의 대표작 ‘랩소디 인 블루’보다 1년가량이나 앞선 것이다.

전체 연주 시간이 약 16분 남짓인 이 곡은 총 여섯 개의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La creation du monde, Op. 81a

1. Overture(00:00~)

시작은 색소폰이 긴 호흡으로 연주하는 레가토 선율이다. 어딘가 공허하고 텅 비어있는 느낌이다. 세 신(神)들이 등장하기 이전, 공백의 상태를 암시하는 것 같다.

2. The Chaos before Creation(03:56~)

기나긴 공허의 끝에, 피아노와 드럼이 등장하면서 마치 때리는 듯 강렬한 리듬을 연주한다. 그 위로 베이스와 금관(트럼펫, 색소폰, 트럼본)이 재즈 선율을 푸가로 연주하는데, 자유분방한 선율이 서로 다른 악기를 통해 대위법적으로 반복되는 이 독특한 느낌은 창조를 담당하는 아프리카의 세 신을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다. 마치 본격적인 창조의 행위에 돌입하기 전, 의식 행위로 자유로운 춤을 추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3. The slowly lifting darkness, the creation of trees, plants, insects, birds and beasts(05:26~)

요란스럽던 광분이 갑자기 잦아든다. 음악은 다시 서곡의 선율을 반복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공허와 어둠이 오래 지속되지 않고 서서히 걷힌다. 플루트에게서 선율을 건네받은 오보에가 느릿느릿 연주하며 서서히 생명이 깨어나는 것을 묘사한다(07:00~). 플루트의 지저귀는 듯한 소리가 약간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데, 곧 지극한 환희를 맞이하기 위한 암시이다.

4. Man and woman created(08:49~)

드디어 인간이 탄생했다. 남자와 여자는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살피고, 움직이며 호기심을 충족하고 기쁨을 만끽한다. 바순의 다소 익살스러운 리듬 위에 얹어지는 두 바이올린의 경쾌한 선율이 인상적이다. 분위기는 점차 역동적으로 고조된다.

5. The desire of man and woman(09:52~)

이윽고 남자와 여자는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고, 사랑의 욕구를 느끼게 된다. 막 몸을 움직이게 되었을 때의 흥분을 묘사하던 떠들썩한 분위기는 가라앉고, 두 사람의 감정을 따라 현이 연주하는 감미로운 선율이 흐른다. 이어서 기교적인 클라리넷 연주가 이어진다.

6. The man and woman kiss(11:40~)

색소폰의 등장과 함께 음악은 다시 오프닝의 느린 선율로 돌아가지만, 이번에는 공허와 어둠 대신 빛과 희망으로 가득 차있다. 음악은 이제 각 파트의 주제들을 다시 한 번 재현하며 떠들썩한 분위기를 몰고 오고, 창조와 사랑의 완성 속에서 완만하게 사그라진다.

2011/07/27 03:08 2011/07/27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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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민들이 정치에 대하여 갖는 영향력 이상으로 시민의 권익이 배려되는 사회적 시스템을 본 일이 없다. 만일 시민혁명의 주체 세력이었던 산업 부르주아들이 제1, 2신분이었던 귀족과 성직자들로부터 권력을 뺏어오는 방법으로서 시민들의 참정권을 고안해내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오늘날 종교적 박해와 조금도 다를 것 없는 경제적 박해를 받아야 했을 것이다. 투표권은 종종 지배 계층의 무분별한 권력 남용을 견제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치로 존재하지만, 보다 강력한 장치로 발전할 가능성도 있다.

미래의 바람직한 사회상은, 중앙 정치보다는 지방 정치가 중시되는 체제를 갖추는 것이다. 국회에서 정당간에 벌어지는 시시콜콜한 다툼이 거대하게 부풀려져서 시골 촌부에게까지 확대 전파되도록 하는 거대 신문들은 없어지는 대신, 지역의 이해와 관심사를 다룬 지방지가 활성화되어야 한다.

사실상 우리는 우리의 실생활과 너무나도 동떨어진 거대한 정치 담론들에 너무 많이 휘둘리고 있으며, 지배자들이 자기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설계하는 정책들에 대해 수동적인 대응으로만 일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정치가들이 결코 자신들의 특권을 희생시키는 새로운 정책을 수립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중국과는 달라서, 시민들이 한 정치가의 정치적 생명을 끊을 수도 있고, 한 정당을 파괴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힘은, 정치 및 경제 분야의 지배자들이 사회 시스템 속에 교묘하게 심어놓은 각종 방해의 장치들과 시민들 스스로의 무관심 때문에 효과적으로 발휘되고 있지 못 하다.

아마도 지배 계층과 피지배 계층의 힘겨루기는 인류가 존속하는 한 영원히 지속될 현상일 것이다. 오늘날 피지배 계층은, 과거 신민들이 절망적인 상태에서 최후의 수단으로 택할 수밖에 없었던 민중 봉기나 납세 거부보다는 보다 효과적으로 자신을 지킬 수단을 보유하고 있다. 만일 정치를 통해 국가의 구성원들 중에서 소수에 해당하는 일부 세력이 아닌, 다수 국민들의 권익이 추구되어야 한다면, 그런 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우리가 가진 힘을 적절히 활용해야만 할 것이다.

2011/07/26 02:59 2011/07/26 0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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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날씨에 등산이라니. 야외 활동은 때론 할 일 없이 사무실에 앉아있는 것보다 좋지만, 그래도 이런 날씨에 등산이라니! 겨우 575m 높이의 (동)산이었지만, 탈진했다. 하산 후에는 회식. 이열치열(以熱治熱)이라며 메뉴는 닭볶음탕. 차를 가져왔다고 하니 다행히 술은 주지 않았다.

9월에는 일본에서 한일 군사 정보교류회의가 열리는데, 내가 통역으로서 따라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과장은 나를 데려가겠다고 해서 가능성이 좀 있을 것 같았는데, 과장보다 높은 처장은 내가 한일 군사 관계에 대한 ‘참신하고 심도 있는’ 발표라도 준비하면 데려가겠다고 한다. 내 몇 번의 중요한 회의 통역을 해 봤지만, 그 꼬락서니를 봐서는 ‘참신하고 심도 있는’을 운운할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

믿는 것보다는 의심하는 것이 지적(知的)인 태도라고 할 수 있다. 합리적인 비판 의식의 기초를 닦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확고한 믿음부터 다시 검증하는 것이다.

2011/07/21 00:31 2011/07/21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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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하구나. 내일은 체련일인데, 등산을 한단다.

2011/07/20 00:41 2011/07/20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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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권력이 개인의 자유를 극단적으로 제한할 수 있는 때는, 전쟁이 일어났을 때이다. 전쟁이 발발하면 군대를 일으키고 필요한 군수 물자를 조달하기 위하여 국가의 가용한 모든 인적 자원과 생산 수단이 동원된다. 이때 국민 개개인은 징병을 당함으로써 신체적 자유가 구속되고, 자본과 생산 수단이 국가에 의해 점유되기 때문에 개인의 이익을 위한 자유로운 경제 행위를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자유의 침해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전쟁 시에는 언론의 자유, 정치적 행위의 자유 나아가서는 생각의 자유마저 빼앗기게 된다. 가령 전쟁의 무익함을 명백히 보여주는 자료를 제시하거나, 청년들을 강제 징병하는 국가 정책에 반대하는 의견을 개진하는 행위는 때때로 도덕적 비난을 넘어 법적 제재를 받기도 한다.

전쟁 시에 개인들이 이런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국가 권력의 비대화를 용인하는 이유는, 전쟁이 국가의 존망이 걸린 대사업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일차원적인 이유는 적에 대한 증오심 때문이다. 인간은 쳐부수고 싶은 적이 있을 때에는 그 적을 무너뜨리기 위해 자신이 상처 입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동물이다. 적개심은 이성을 마비시키고, 합리적인 판단을 방해하며, 감정에 따라 분풀이를 하도록 부추긴다. 이러한 증오심이 국가나 정당의 선전을 통해 마치 긍정적인 에너지인 것처럼 둔갑되는 경우는 왕왕 있다. 그 대표적인 수단은 이른바 애국심에 호소하는 것이다.

1차 세계대전 종료 후 미국, 영국, 프랑스 국민들은 자신들의 조국이 독일인 병사들을 더 많이 살해하고, 그들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강화 조약을 맺은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들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영광스러운 조국을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그 자랑스러운 조국은 동시에 전쟁의 광기로부터 벗어나 합리성을 되찾을 것을 역설한 수많은 지식인들의 목소리를 묵살하거나 그들을 지위에서 끌어내리거나 심지어는 감옥에 처넣어버린 나라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승리자들을 그토록 만족시켰던, 패자에 대한 가혹한 처사는 이후에 더 큰 전쟁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처럼 증오심은 사람을 맹목적으로 만든다. 맹목적이 되어버린 사람만큼 통제하기 쉬운 대상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의 증오심을 부추기는 이 수단은, 오늘날의 정당정치 체제에서도 대단히 유효하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정당은 국민들의 지지를 통해서만 권력을 얻을 수 있다. 이론상으로 그 권력은 직접 정치에 참여할 수 없는 수많은 국민들로부터 위임받는 것이기 때문에, 정당은 권력의 주인인 지지자를 가장 두려워해야 하며, 국민은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을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 그러나 현대 민주사회에서는 이와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나고 있다. 즉 정당은 자신의 지지자들을 가장 만만하게 본다. 한편 국민들은 자기가 지지하는 정당이 하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지지하지 않는 정당의 정책에만 늘 비난을 퍼붓는다. 이것은 우리가 항상 적개심과 분노를 가슴에 품고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일이다.

정치인들은 적(敵)을 만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특히 공적인 경우에 그러하다. 국가 원로와 경제인과 엘리트들을 서민의 적으로 돌리거나, 노동자와 대학생을 자유주의의 적으로 돌리는 일은, 거의 언제나 특정 정당에게 유리하다. 국민들이 어느 한 편견의 지지자가 되어 다른 생각을 지닌 사람들을 더 많이 증오하고 비난할수록, 정당은 실제 정책의 방향성이나 그것의 실천 여부와는 상관없이 확고한 지지기반을 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이든 단체든 자신의 이익이 되는 쪽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다. 그렇다면 ‘정치적 화합’이라는 말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정치인들에게만 맡겨놓는 한, 화합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방법은 국민들이 똑똑해지는 것이다. 관용은 분명 증오심보다는 격조가 있는, 추구할 만한 덕목이다. 그러나 관용의 정신은 단지 그것이 도덕적인 가치라는 이유만으로 추구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인간이 감정이 휘둘리지 않고 합리적으로 판단하기 위해 필수적이라는 이유 때문에도 반드시 추구되어야 할 가치이다. 우리는 정치인이나 언론이 즐겨 언급하는 범주, 이를테면 ‘서민’, ‘학생’, ‘지역민’, ‘고용주’ 따위에 스스로를 포함시킬 필요가 없다. 차분히 생각해보면 국민은 누구나 어떤 범주에라도 포함될 여지가 있다.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판단 기준을 명확히 하고, 다른 생각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갖는 것이다. 이것은 민주 시민의 자격이다.

2011/07/19 00:15 2011/07/19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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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관들의 하와이 출장을 배웅하러 인천 공항에 다녀왔다. 원칙적으로 관용차는 장거리를 운행할 때 반드시 간부 1명 이상이 동승을 해야 한다. 병사들만 운전하게 놔두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 때문일까. 아무튼 일요일에 공항까지 배웅을 나간 건, 사실 상관들이 대전에서부터 타고 간 관용차를 주어오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편하게 내려오기는 했다.

인천 공항은 오랜만이었다. 작년 2월, 중국 여행 이후 약 1년 반 만이다. 나는 공항이 좋다. 공항의 분위기를 좋아한다. 여행의 설렘으로 가득한 사람들의 표정을 바라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본격적인 여름 여행 성수기를 맞아서, 공항은 사람들로 붐볐다. 나도 여행을 떠나고 싶다. 2006년 이후로 작년까지 매년 1회 이상 출국을 했는데, 올해는 과연 해외에 갈 수 있을까.

공항으로 가기 전, 김선민과 잠깐 만났다. 지나가는 공군 이병을 보고 김선민군 왈, “쟤 앞으로 남은 군 생활 생각하면 불쌍하다.”

함께 웃다가…….

“근데 나보다 먼저 제대하네.”

상관들이 다 출장을 가버렸으니, 내일부터 한 주는 한가할 듯하다. 아니 난 원래 한가했지만.

2011/07/18 01:13 2011/07/18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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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속 3일째. 아직 출장 온 느낌이다. 곧 돌아가야만 할 것 같은. 긴장 속에서 지내다보니 피로가 쌓인다. 한 주가 무척 길게 느껴진다.

바이올린 레슨도 아직 시작을 안 했고, 연습 공간도 없어서 저녁에는 할 일이 없다. 그러니 하루가 더 길게 느껴지는 것 같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저녁이라는 건 너무 권태롭구나.

벌써 며칠 째 비가 계속 내리고 있는 건지, 이제는 헤아릴 수조차 없다. 아침마다 빗소리를 들으며 깨어나는 데에 익숙해졌다. 내 방은 창 바로 앞에 건물 벽이 버티고 있어서 가뜩이나 채광이 나쁜데, 날이 맑지 않으니 방 안이 시종 우중충하다.

오늘은 체련일이었다. 비행단에서는 운동하기 싫어도 억지로 해야만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여기서는 위관 이하는 축구에 껴 주지도 않는 경우가 있다. 비행단 정보처야 사람 다 모아도 10명 정도인데, 본부 정보처는 서로 팀을 나눠 축구를 하고도 관중할 사람이 남을 정도이니…….

이번 주말에는 오랜만에 집에 갈 듯하다.

2011/07/13 23:23 2011/07/13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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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은 생활은 안정시키는 것이 시급하다. 당초 전속은 3월쯤에는 윤곽이 드러나서 4월이나 늦어도 5월에는 성사될 걸로 생각했다. 올해 많은 계획들이 있었음에도 실행을 미룰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언제 이사를 하게 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속이 거의 확정된 6월부터는 이런저런 일들로 정신이 없어 바이올린 연습도 제대로 못 했다. 훈련소에서 악기를 만질 수조차 없었을 때에는 그렇게 흘러가는 하루하루가 안타깝게 여겨졌지만, 지금은 바쁘다는 핑계로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이게 훨씬 위험한 상태지.

레슨 선생님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물색하고 있다. 부대 안에서 연습을 할 수 있었던 충주에서와는 달리, 여기서는 레슨 해주는 곳에서 연습 장소도 제공해줘야 한다는 까다로운 조건이 따라붙어서 선생님 구하기는 만만치 않을 것 같다. 평일 퇴근 이후에 적어도 밤 10시까지는 연습 시간을 보장 해 주는 곳이 아니면 안 된다. 정 안되면 피아노 레슨이라도 추가로 받아서 연습실을 확보할 생각이지만, 월세로 인한 고정 지출까지 생긴 마당에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일들을 벌이는 건 우선 금전적으로 부담이 된다.

이제 주말마다 서울 올라가는 짓은 좀 자제하고, 지방에서의 생활을 즐겨볼까 한다. 영어 회화 학원도 다닐까 하는데, 마침 대전에 YBM 어학원이 있다. 내가 분명 회화 최고 레벨 반까지는 갔던 것 같은데. 운동으로는 테니스를 좀 배워볼까 생각하고 있다.

일단 7월은 새로운 근무 환경에 익숙해지는 데에 집중해야지.

2011/07/10 23:07 2011/07/10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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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이다. 이것도 이사라고 엄청 피곤하군. 내일 몸을 움직일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몸살 날 것 같은데.

2011/07/09 23:44 2011/07/09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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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대한민국 공군 참모총장 / 우, 일본 항공자위대 서부항공방면대 사령관)

충주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첫 출근을 앞둔 긴장 상태에서 바닥에 얇은 이불 하나 깔아놓고 누워서 애써 잠을 청하던 1년 전이 떠오르는군. 첫 출근을 알리는 알람 소리는 이질적이었지. 그 푸르스름한 새벽의 빛 자체가 너무 낯설었다. 하지만 시간은 계속 흐르고, 그 증거로 나는 중위가 되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너무 익숙해져버린 지금, 내 생활에는 다시 한 번 변화가 찾아오게 되었다.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통역을 했다. 이번에 방한한 일본 항공자위대 서부방면대 사령관은 작년에 한일 정보교류회의차 방한하였던 사람이고, 그때도 내가 통역을 맡았다. 이번에 다시 한국을 찾으면서 통역으로 나를 지명했다고 하니, 작년 내 통역이 썩 만족스러웠던 모양이다. 3박 4일의 공식 일정 중 2박 3일 동안 동행했는데, 11비 단장, 남부전투사령관, 군수사령관, 참모총장 등을 차례로 만났다. 지금까지의 통역 중 가장 화려한 일정이었다. 내가 통역하는 장면은 국방일보 기사에도 실렸고, 공군 홈페이지에도 떴다. 덕분에 부대 복귀하니 알아보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다른 부대의 동기들로부터 연락도 좀 받고.

그리고 나는 부대 복귀와 함께 전출 신고를 했다. 7월 11일부로, 나는 공군본부의 항공정보과로 전속된다. 나의 보직은 “통역/정보교류지원담당”으로, 제2외국어 어학 장교가 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역 관련 보직이다.

나는 운이 좋다. 이 사실을 의심해본 적이 없다.

2008년도에, 난 조기졸업을 신청하려고 했다. 필요 학점을 채우고 성적이 3.75 이상이면 조기 졸업 신청을 할 수 있다. 나는 조건을 충족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교무처에서 조기졸업 관련 상담을 받았는데, 직원이 내 교과 이수 현황을 살펴보더니 문제점을 지적했다. 단위가 높은 고급 과목을 덜 이수해서 졸업 요건을 충족하지 못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한 학기를 더 다닐 수박에 없었는데, 만일 그때 조기 졸업을 했더라면 유포니아에 들어가 내 대학 생활의 마지막을 그렇게 즐겁게 보낼 수도 없었을 것이고, 또 만약 1년 일찍 입대했다면 이번 전속과 같은 기회는 얻지 못 했을 것이다.

2009년 6월, 청주 공군사관학교에서 일본어 어학장교 선발 시험을 치렀는데, 응시자는 나를 포함해서 겨우 세 명이었다. 이것은 아마 역대 최저 지원이었을 것이다. 경쟁자들 중 한 사람은 홋카이도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했고, 다른 한 명은 교토대 대학원에 재학중이었다. 일본에서의 거주 경험이라고는 오사카 대학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한 1년이 전부였던 나는, 이 둘을 이기기 힘들 거라고 생각해서 마음을 비우고 있었다. 한 달쯤 후, 여행 중이던 나는 이스탄불에서 합격 소식을 통보 받았다.

같은 해 8월, 나는 결국 8학기를 모두 채우고 졸업했고, 9월에 바로 입대했다. 하지만 입대 1주일 만에 정밀신체검사에서 이상이 발견되어 귀가 조치를 당하는 어이없는 일을 겪었다. 대학 병원에서 검사를 통해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지만, 재입대까지는 6개월을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 6개월의 유예는, 결과적으로는 또 다른 행운으로 작용했다. 왜냐하면 6개월의 지연 덕분에, 내가 임관함과 동시에 당시까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던 일어 통역 장교가 전역을 했고, 내가 자연스럽게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6개월 동안 나는 무위도식하며 즐거운 백수 생활을 만끽했고, 유포니아 연주회에 참여하여 차이코프스키 5번을 연주하는 감동의 순간을 함께했다.

2010년 3월이 되어서야 재입대를 했고, 미리 의사의 소견서까지 준비하는 치밀한 준비로 이번에는 건강검진도 무사히 통과하여 3개월 반 동안의 지겨운 훈련을 받을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교육사령부 연병장에서 정모를 던지며 임관을 자축하던 그 시간은, 한 인간의 평생 동안 모두 합쳐 약 3분 정도에 불과하다는 지극한 환희의 순간에 포함될 것이다.

나는 어학 장교로 선발되었지만, 제2외국어 어학 장교로서 차별 아닌 차별을 받아 ‘정보 특기’로 분류되었고, 여느 정보 장교들과 다름없이, 어학과는 무관한 정보 관련 보직을 받게 되었다. 훈련단 성적도 나쁘고, 특기교육 성적도 형편없었던 나는, 배속지를 고를 때에 남들이 가지 않으려 하는 몇 개의 남은 지역 중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충주라고 하는 애매한 도시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통역 장교의 꿈이 서서히 멀어져가는 게 느껴지던 임관 3개월 차에, 첫 통역 의뢰가 들어왔다. 일본 CSC 과정생들의 비행단 견학 때 대담과 현황 보고, 그리고 비행단 안내 등을 통역하는 역할이었다. 첫 통역이었던 만큼 긴장했고, 발표 자료를 번역하느라 밤도 샜다. 지금 생각하면 실수도 많았고 요령도 없었던 부끄러운 통역이지만, 당시에는 ‘할만하다’는 자신감을 얻는 계기가 됐다.

첫 통역의 물꼬가 트이자 금방 다음 의뢰도 들어왔다. 내가 일어 통역 장교로서 입지를 다지는 데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공군전우회 행사 통역이 두 번째 의뢰였다. 한국을 방문한 일본 자위대 전역자들과 동행하며 통역하는 것이었는데, 방문단 중에 항공 막료장(한국의 참모총장)을 역임한 사람이 둘이나 있었다. 서울과 평택, 서산과 판문점 등을 오가며 3박 4일 동안 정신없이 통역을 했다. 사전에 자료도 받지 못 한 상태에서 브리핑을 즉시 통역하는가 하면, 사찰을 방문해서는 스님의 불교 역사와 철학에 대한 장광설을 통역해야 하기도 했다. 난이도 높은 통역이었지만, 덕분에 일본 방문단은 나의 능력에 대해 크게 만족했고, 나의 존재가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쪽에도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과거 참모총장을 지낸 사람이 대여섯명이나 앉아있는 만찬장에서, 나는 일본 방문단장으로부터 “단기 장교로 제대시키기에는 아까운 인재”라는 극찬도 들었다.

이를 계기로 나는 곧바로 공군 제1의 일본어 통역장교가 되었다. 전우회 통역을 마치고 부대로 복귀한 당일,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자네가 전우회 통역을 했다며? 대단한 통역이라고 평이 자자하던데. 이번에 내가 널 좀 데려다 써야겠다.”

이때의 통역 일이 정보교류회의건이었는데, 본부 주관 행사의 첫 통역이었다. 방문단장은 부인과 동행했는데, 사모님의 관광에 동행하는 서브 통역은 오히려 선배에게 돌아가고, 나에게는 방문단장과 동행하며 공식적인 예방과 회의시에 통역을 하는 메인의 자리가 주어졌다. 나는 서브 경험이 없이 곧바로 메인으로 데뷔했다.

통역 때는 약간의 묘기 같은 능력도 선보였다. 나는 통역 때 메모를 거의 하지 않는데, 아무리 긴 문장도(심지어 횡설수설도) 메모 없이 거의 정확하게 통역할 수 있었다. 마침 방문단장과 사모님이 모두 한국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내가 통역하는 내용을 거의 다 알아들을 수가 있어서, 이런 나의 능력이 훨씬 빛을 발했다. 방문단장은 마치 내가 어느 정도까지 기억할 수 있는지 시험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점점 한 번에 많은 말을 했다. 다행히 그 시험에서 나는 합격 한 모양이었다.

공군본부에 제2외국어 어학장교가 갈 수 있는 통역 관련된 자리가 있다는 건 정보교류회의 통역 때 처음 알게 되었다. 그 자리가 내 자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은 중국어 통역 장교였는데, 2011년 6월 제대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 후임으로는 나 혹은 내 동기인 중국어 통역 장교가 유력했다.

정보교류회의 통역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본부에서 나에 대한 평가는 최고조에 달했기 때문에, 전속에 대한 전망은 매우 밝았다. 심지어는 정기 인사이동 기간 전에 미리 옮기려는 움직임까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훌륭한 통역으로 깊은 인상을 심어주어도, 그건 단발적인 이벤트에 지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잊히기 마련이고, 위관 장교의 전속 문제를 그리 심각하게 지속적으로 고민해 줄 사람은 없었다.

정보교류회의의 주최자가 진급하여 자리를 옮기고, 그 밑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인사이동을 하고 나니, 본부에서 나의 능력을 인정해 줄 사람은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2010년 11월에는 연평도 사건이, 이듬해 3월에는 일본에서 대지진이 일어나 예정 되어있던 통역 건들이 줄줄이 취소되어버렸다. 확고해 보였던 나의 입지는 졸지에 위태로워졌다. 이제는 가만히 기다린다고 내게 그 자리가 거저 돌아오게 될 상황이 아니었다.

당시 본부 통역장교의 자리에 있던 선배와 연락하여 내 의지를 분명히 피력하는 한편, 나와 함께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던 동기와는 평소 친분을 이용해 설득을 시도했다. 다행히 중국어 통역 장교였던 그 동기는 통역 경험이 없었고, 본부로 움직이는 것에 큰 뜻이 없었다. 3월 말경에 나는 이미 본부에 이력서를 제출했다. 당시까지 사무실 사람들은 아무도 나의 이런 의지와 행동을 알지 못 했는데, 나는 이 일을 무려 6개월 이상이나 비밀로 간직하며 은밀하게 행동했다.

4월 말쯤 하여 긍정적인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적절한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나의 전속이 거의 확정적이라는 소식이었다. 나는 속으로 웃었지만, 아직 끝이 아니었다. 생각지도 못한 돌발 사태가 터지면서 지옥 같은 5월은 시작되었다.

평소 부대 생활에 잘 적응을 못 하고, 나에 대해 열등감까지 품고 있던 룸메이트가 돌연 전속 신청을 냈다. 사무실 사람들이 설득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막무가내였고, 결국 뜻이 받아들여졌다. 문제는 한 사무실에서 동시에 두 명이 전속을 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본부에서도 곤혹스러워했고, 내 전속 여부는 불투명해졌다. 날마다 서로 다른 전망이 나왔고, 갈 수 있다, 없다란 의견이 몇 번씩이나 뒤집혔다. 여간해서는 정신의 건전함을 잃지 않는 나도, 잠 못 이루는 한 달을 보내야 했다.

6월이 되어서야 결론이 났는데, 나를 데려가고자 하는 본부 정보과의 확고한 의지와,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주자는 처장님의 관대한 결정 덕분에 전속이 결정되었다.

앞으로 나는 전투복이 아닌 약복을 입고, 외부의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지하 벙커가 아니라 삼군이 모두 모여 있는 본부 건물의 빛 잘 드는 사무실에서 근무하게 될 것이다. 본부의 숙소는 너무 열악해서, 계룡대와 대전 시내의 중간 지점에 월세 원룸 하나를 얻었다. 어제는 사무실 사람들과, 오늘은 음악학원 사람들과 송별회를 했다. 우체국 택배 박스에 짐을 우겨 넣고, 내일 1톤 트럭을 불러 이사를 할 예정이다.

공군본부 항공정보과 통역/정보교류지원담당, 중위 김민.

어떤 것은 노력으로, 어떤 것은 운으로 이루어졌다.

2011/07/09 02:39 2011/07/09 02: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