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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 이틀 차. 나는 여전히 치이고 있다. 내가 속한 상황실에서, 나의 업무 처리 능력과 성실함이 으뜸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사정을 모르는 다른 상황실에서는 나를 닦달하고, 나무라고, 심지어는 깔보며 무시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나는 우직하게 규정과 절차를 준수하며, 부여된 임무에 대해 하나하나 물어보면서 처리한다. 무슨 험한 말을 듣든, 나는 낮은 자세를 잃지 않는다.

내가 믿고 따를 수 있는 지침을 내려주는 윗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참 서글픈 일이다. 사람 보는 눈이 없고, 자기 자신을 돌아볼 능력은 더더욱 없는 인간들에게는, 차라리 동정심이 든다. 말만 번지르르한 인간들. 그들이 무책임하게 내뱉어놓은 허언들만이 쌓이고 쌓여서 이 참혹한 세상을 빚어버렸다. 모든 것을 임기응변으로 처리해야 될 바에야, 차라리 훈련 지침을 나에게 새로 만들게 해주면 좋을 텐데. 언제나 규정은 능률 위에 있고, 계급은 규정 위에 군림한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세상에서, 나는 차라리 ‘무능력하다’는 말을 칭찬으로 알고 들으련다.

다음 주, 대전시립교향악단의 연주회를 예약 해 놓았는데, 훈련 때문에 연주회를 보러갈 수 없게 생겼다. 내가 자리를 지키고 앉아 보내는 12시간이, 음악회에서 오케스트라의 튜닝을 지켜보는 시간만큼의 가치라도 있었더라면 이렇게 억울하지는 않을 것을.

나는 꽤 쓸 만한 사람인데, 나를 쓸 만한 사람은 도통 없다.

2011/08/18 00:16 2011/08/18 0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