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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은 생활은 안정시키는 것이 시급하다. 당초 전속은 3월쯤에는 윤곽이 드러나서 4월이나 늦어도 5월에는 성사될 걸로 생각했다. 올해 많은 계획들이 있었음에도 실행을 미룰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언제 이사를 하게 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속이 거의 확정된 6월부터는 이런저런 일들로 정신이 없어 바이올린 연습도 제대로 못 했다. 훈련소에서 악기를 만질 수조차 없었을 때에는 그렇게 흘러가는 하루하루가 안타깝게 여겨졌지만, 지금은 바쁘다는 핑계로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이게 훨씬 위험한 상태지.

레슨 선생님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물색하고 있다. 부대 안에서 연습을 할 수 있었던 충주에서와는 달리, 여기서는 레슨 해주는 곳에서 연습 장소도 제공해줘야 한다는 까다로운 조건이 따라붙어서 선생님 구하기는 만만치 않을 것 같다. 평일 퇴근 이후에 적어도 밤 10시까지는 연습 시간을 보장 해 주는 곳이 아니면 안 된다. 정 안되면 피아노 레슨이라도 추가로 받아서 연습실을 확보할 생각이지만, 월세로 인한 고정 지출까지 생긴 마당에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일들을 벌이는 건 우선 금전적으로 부담이 된다.

이제 주말마다 서울 올라가는 짓은 좀 자제하고, 지방에서의 생활을 즐겨볼까 한다. 영어 회화 학원도 다닐까 하는데, 마침 대전에 YBM 어학원이 있다. 내가 분명 회화 최고 레벨 반까지는 갔던 것 같은데. 운동으로는 테니스를 좀 배워볼까 생각하고 있다.

일단 7월은 새로운 근무 환경에 익숙해지는 데에 집중해야지.

2011/07/10 23:07 2011/07/10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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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이다. 이것도 이사라고 엄청 피곤하군. 내일 몸을 움직일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몸살 날 것 같은데.

2011/07/09 23:44 2011/07/09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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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대한민국 공군 참모총장 / 우, 일본 항공자위대 서부항공방면대 사령관)

충주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첫 출근을 앞둔 긴장 상태에서 바닥에 얇은 이불 하나 깔아놓고 누워서 애써 잠을 청하던 1년 전이 떠오르는군. 첫 출근을 알리는 알람 소리는 이질적이었지. 그 푸르스름한 새벽의 빛 자체가 너무 낯설었다. 하지만 시간은 계속 흐르고, 그 증거로 나는 중위가 되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너무 익숙해져버린 지금, 내 생활에는 다시 한 번 변화가 찾아오게 되었다.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통역을 했다. 이번에 방한한 일본 항공자위대 서부방면대 사령관은 작년에 한일 정보교류회의차 방한하였던 사람이고, 그때도 내가 통역을 맡았다. 이번에 다시 한국을 찾으면서 통역으로 나를 지명했다고 하니, 작년 내 통역이 썩 만족스러웠던 모양이다. 3박 4일의 공식 일정 중 2박 3일 동안 동행했는데, 11비 단장, 남부전투사령관, 군수사령관, 참모총장 등을 차례로 만났다. 지금까지의 통역 중 가장 화려한 일정이었다. 내가 통역하는 장면은 국방일보 기사에도 실렸고, 공군 홈페이지에도 떴다. 덕분에 부대 복귀하니 알아보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다른 부대의 동기들로부터 연락도 좀 받고.

그리고 나는 부대 복귀와 함께 전출 신고를 했다. 7월 11일부로, 나는 공군본부의 항공정보과로 전속된다. 나의 보직은 “통역/정보교류지원담당”으로, 제2외국어 어학 장교가 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역 관련 보직이다.

나는 운이 좋다. 이 사실을 의심해본 적이 없다.

2008년도에, 난 조기졸업을 신청하려고 했다. 필요 학점을 채우고 성적이 3.75 이상이면 조기 졸업 신청을 할 수 있다. 나는 조건을 충족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교무처에서 조기졸업 관련 상담을 받았는데, 직원이 내 교과 이수 현황을 살펴보더니 문제점을 지적했다. 단위가 높은 고급 과목을 덜 이수해서 졸업 요건을 충족하지 못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한 학기를 더 다닐 수박에 없었는데, 만일 그때 조기 졸업을 했더라면 유포니아에 들어가 내 대학 생활의 마지막을 그렇게 즐겁게 보낼 수도 없었을 것이고, 또 만약 1년 일찍 입대했다면 이번 전속과 같은 기회는 얻지 못 했을 것이다.

2009년 6월, 청주 공군사관학교에서 일본어 어학장교 선발 시험을 치렀는데, 응시자는 나를 포함해서 겨우 세 명이었다. 이것은 아마 역대 최저 지원이었을 것이다. 경쟁자들 중 한 사람은 홋카이도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했고, 다른 한 명은 교토대 대학원에 재학중이었다. 일본에서의 거주 경험이라고는 오사카 대학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한 1년이 전부였던 나는, 이 둘을 이기기 힘들 거라고 생각해서 마음을 비우고 있었다. 한 달쯤 후, 여행 중이던 나는 이스탄불에서 합격 소식을 통보 받았다.

같은 해 8월, 나는 결국 8학기를 모두 채우고 졸업했고, 9월에 바로 입대했다. 하지만 입대 1주일 만에 정밀신체검사에서 이상이 발견되어 귀가 조치를 당하는 어이없는 일을 겪었다. 대학 병원에서 검사를 통해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지만, 재입대까지는 6개월을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 6개월의 유예는, 결과적으로는 또 다른 행운으로 작용했다. 왜냐하면 6개월의 지연 덕분에, 내가 임관함과 동시에 당시까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던 일어 통역 장교가 전역을 했고, 내가 자연스럽게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6개월 동안 나는 무위도식하며 즐거운 백수 생활을 만끽했고, 유포니아 연주회에 참여하여 차이코프스키 5번을 연주하는 감동의 순간을 함께했다.

2010년 3월이 되어서야 재입대를 했고, 미리 의사의 소견서까지 준비하는 치밀한 준비로 이번에는 건강검진도 무사히 통과하여 3개월 반 동안의 지겨운 훈련을 받을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교육사령부 연병장에서 정모를 던지며 임관을 자축하던 그 시간은, 한 인간의 평생 동안 모두 합쳐 약 3분 정도에 불과하다는 지극한 환희의 순간에 포함될 것이다.

나는 어학 장교로 선발되었지만, 제2외국어 어학 장교로서 차별 아닌 차별을 받아 ‘정보 특기’로 분류되었고, 여느 정보 장교들과 다름없이, 어학과는 무관한 정보 관련 보직을 받게 되었다. 훈련단 성적도 나쁘고, 특기교육 성적도 형편없었던 나는, 배속지를 고를 때에 남들이 가지 않으려 하는 몇 개의 남은 지역 중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충주라고 하는 애매한 도시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통역 장교의 꿈이 서서히 멀어져가는 게 느껴지던 임관 3개월 차에, 첫 통역 의뢰가 들어왔다. 일본 CSC 과정생들의 비행단 견학 때 대담과 현황 보고, 그리고 비행단 안내 등을 통역하는 역할이었다. 첫 통역이었던 만큼 긴장했고, 발표 자료를 번역하느라 밤도 샜다. 지금 생각하면 실수도 많았고 요령도 없었던 부끄러운 통역이지만, 당시에는 ‘할만하다’는 자신감을 얻는 계기가 됐다.

첫 통역의 물꼬가 트이자 금방 다음 의뢰도 들어왔다. 내가 일어 통역 장교로서 입지를 다지는 데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공군전우회 행사 통역이 두 번째 의뢰였다. 한국을 방문한 일본 자위대 전역자들과 동행하며 통역하는 것이었는데, 방문단 중에 항공 막료장(한국의 참모총장)을 역임한 사람이 둘이나 있었다. 서울과 평택, 서산과 판문점 등을 오가며 3박 4일 동안 정신없이 통역을 했다. 사전에 자료도 받지 못 한 상태에서 브리핑을 즉시 통역하는가 하면, 사찰을 방문해서는 스님의 불교 역사와 철학에 대한 장광설을 통역해야 하기도 했다. 난이도 높은 통역이었지만, 덕분에 일본 방문단은 나의 능력에 대해 크게 만족했고, 나의 존재가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쪽에도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과거 참모총장을 지낸 사람이 대여섯명이나 앉아있는 만찬장에서, 나는 일본 방문단장으로부터 “단기 장교로 제대시키기에는 아까운 인재”라는 극찬도 들었다.

이를 계기로 나는 곧바로 공군 제1의 일본어 통역장교가 되었다. 전우회 통역을 마치고 부대로 복귀한 당일,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자네가 전우회 통역을 했다며? 대단한 통역이라고 평이 자자하던데. 이번에 내가 널 좀 데려다 써야겠다.”

이때의 통역 일이 정보교류회의건이었는데, 본부 주관 행사의 첫 통역이었다. 방문단장은 부인과 동행했는데, 사모님의 관광에 동행하는 서브 통역은 오히려 선배에게 돌아가고, 나에게는 방문단장과 동행하며 공식적인 예방과 회의시에 통역을 하는 메인의 자리가 주어졌다. 나는 서브 경험이 없이 곧바로 메인으로 데뷔했다.

통역 때는 약간의 묘기 같은 능력도 선보였다. 나는 통역 때 메모를 거의 하지 않는데, 아무리 긴 문장도(심지어 횡설수설도) 메모 없이 거의 정확하게 통역할 수 있었다. 마침 방문단장과 사모님이 모두 한국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내가 통역하는 내용을 거의 다 알아들을 수가 있어서, 이런 나의 능력이 훨씬 빛을 발했다. 방문단장은 마치 내가 어느 정도까지 기억할 수 있는지 시험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점점 한 번에 많은 말을 했다. 다행히 그 시험에서 나는 합격 한 모양이었다.

공군본부에 제2외국어 어학장교가 갈 수 있는 통역 관련된 자리가 있다는 건 정보교류회의 통역 때 처음 알게 되었다. 그 자리가 내 자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은 중국어 통역 장교였는데, 2011년 6월 제대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 후임으로는 나 혹은 내 동기인 중국어 통역 장교가 유력했다.

정보교류회의 통역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본부에서 나에 대한 평가는 최고조에 달했기 때문에, 전속에 대한 전망은 매우 밝았다. 심지어는 정기 인사이동 기간 전에 미리 옮기려는 움직임까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훌륭한 통역으로 깊은 인상을 심어주어도, 그건 단발적인 이벤트에 지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잊히기 마련이고, 위관 장교의 전속 문제를 그리 심각하게 지속적으로 고민해 줄 사람은 없었다.

정보교류회의의 주최자가 진급하여 자리를 옮기고, 그 밑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인사이동을 하고 나니, 본부에서 나의 능력을 인정해 줄 사람은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2010년 11월에는 연평도 사건이, 이듬해 3월에는 일본에서 대지진이 일어나 예정 되어있던 통역 건들이 줄줄이 취소되어버렸다. 확고해 보였던 나의 입지는 졸지에 위태로워졌다. 이제는 가만히 기다린다고 내게 그 자리가 거저 돌아오게 될 상황이 아니었다.

당시 본부 통역장교의 자리에 있던 선배와 연락하여 내 의지를 분명히 피력하는 한편, 나와 함께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던 동기와는 평소 친분을 이용해 설득을 시도했다. 다행히 중국어 통역 장교였던 그 동기는 통역 경험이 없었고, 본부로 움직이는 것에 큰 뜻이 없었다. 3월 말경에 나는 이미 본부에 이력서를 제출했다. 당시까지 사무실 사람들은 아무도 나의 이런 의지와 행동을 알지 못 했는데, 나는 이 일을 무려 6개월 이상이나 비밀로 간직하며 은밀하게 행동했다.

4월 말쯤 하여 긍정적인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적절한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나의 전속이 거의 확정적이라는 소식이었다. 나는 속으로 웃었지만, 아직 끝이 아니었다. 생각지도 못한 돌발 사태가 터지면서 지옥 같은 5월은 시작되었다.

평소 부대 생활에 잘 적응을 못 하고, 나에 대해 열등감까지 품고 있던 룸메이트가 돌연 전속 신청을 냈다. 사무실 사람들이 설득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막무가내였고, 결국 뜻이 받아들여졌다. 문제는 한 사무실에서 동시에 두 명이 전속을 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본부에서도 곤혹스러워했고, 내 전속 여부는 불투명해졌다. 날마다 서로 다른 전망이 나왔고, 갈 수 있다, 없다란 의견이 몇 번씩이나 뒤집혔다. 여간해서는 정신의 건전함을 잃지 않는 나도, 잠 못 이루는 한 달을 보내야 했다.

6월이 되어서야 결론이 났는데, 나를 데려가고자 하는 본부 정보과의 확고한 의지와,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주자는 처장님의 관대한 결정 덕분에 전속이 결정되었다.

앞으로 나는 전투복이 아닌 약복을 입고, 외부의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지하 벙커가 아니라 삼군이 모두 모여 있는 본부 건물의 빛 잘 드는 사무실에서 근무하게 될 것이다. 본부의 숙소는 너무 열악해서, 계룡대와 대전 시내의 중간 지점에 월세 원룸 하나를 얻었다. 어제는 사무실 사람들과, 오늘은 음악학원 사람들과 송별회를 했다. 우체국 택배 박스에 짐을 우겨 넣고, 내일 1톤 트럭을 불러 이사를 할 예정이다.

공군본부 항공정보과 통역/정보교류지원담당, 중위 김민.

어떤 것은 노력으로, 어떤 것은 운으로 이루어졌다.

2011/07/09 02:39 2011/07/09 0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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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도 가끔은 드라마 같을 때가 있다. 로맨스는 없지만.

어떤 것은 노력으로, 어떤 것은 운(運)으로 이루어졌다.

세상 꼭대기에 서보려는 욕심도 없고 처절하게 살지도 않지만, 무심한 듯 성실하게, 평범하지만 진지하게 살아간다.

2011/06/23 23:17 2011/06/23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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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 소위가 왔다. 관사에 여유가 없어서, 우리 방으로 데려왔다. 일단은 박 소위가 쓰는 큰 방으로 들여보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내가 작은 방을 쓰기로 한 것은 정말 탁월한 결정이었다. 방이 좁다는 핑계로 혼자 쓸 수 있으니 말이다.

작년 10월 무렵에나 설치해서 제대로 한 번 켜보지도 못 했던 에어컨을, 지금 아주 잘 쓰고 있다. 어제까지만 해도 밤에는 견딜만했는데, 오늘 비가 오고 나니까 본격적으로 찜통더위가 시작됐다. 방 안이 습습하다.

그리고 확정. 다 이루어졌도다.
정말 소길(小吉)정도는 타고난 인생이군.

2011/06/23 00:42 2011/06/23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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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초, 외할머니 생신이라 대구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과천에 들렀는데, 맥도날드 앞에서 고등학교 동창 셋을 만났다. 셋 모두 졸업 후에 처음 보는데, 내가 일본에서 살고 있는 줄 알고 있었다. 아무튼 그 중 한 명이 동원 예비군차 지금 충주에 와 있다. 게다가 또 다른 동창도 함께 말이다. 졸업 후에 한 번도 만난 적 없고, 만나려고 시도한 적조차 없는데 이렇게 만나지는 걸 보면 신기하기도 하다. 저녁이라도 사주고 싶었지만, 예비군들은 일과 끝나면 숙소 밖으로 나가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창문을 통해서 몰래 사식을 좀 넣어주는 것에 그쳤다. 사식이래 봤자 과자와 음료수 정도였지만.

바이올린 학원 사람들과의 회식은, 내 일정이 조정됨에 따라 한 주 미뤘다. 레슨을 추가로 받을 여유는 없을 것 같다. 10개월 가까이 레슨을 받았고, 비록 단 1회 연주 후에 원년 멤버들이 모두 탈퇴(당)한 황당한 단체이지만, 충주 시민 오케스트라 창단 연주회에 참여하는 재밌는 기회도 얻었다. 새 레슨 선생님 정보도 좀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런 건 많이 알아둘수록 좋으니 거절할 이유가 없다.

목요일에 소위 한 명이 충원된다고 한다. 한 1~2주 있다가 곧바로 3주짜리 교육 파견을 간다. 그 교육은 초급정보장교 교육인데, 교육생들 중 1~2명 정도가 더 이쪽 사무실로 올 예정이다. 목요일에 오는 소위에게 약을 먹여서 교육 기간 동안 질 좋은 애들 좀 구워삶아 오게 만들어야겠다. 떠난 뒷자리에 말이 무성하면 나로서도 편할 게 없지. 이제 이쪽도 좀 안정됐으면 좋겠다.

지난 주 토요일에는 훈련소 시절 같은 소대였던 동기 몇과 만났다. 베트남 음식점에서 하노이, 사이공 맥주로 두어 잔씩 걸치며, 동기 한 명의 군 생활 하소연을 들어줬다. 그러다 중간에 합류한 시니컬한 철학자에게 상담역을 맡기고, 문화의 향취와 역사의 흔적을 즐기는 취미를 공유하는 한 살 위의 형과 함께 경복을 1시간가량 산책했다. 다시 저녁때는 독일식 맥줏집에서 족발을 안주 삼아 시원한 맥주를 들이키며 수다를 좀 떨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주변에 살기 힘들다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10월 초쯤에 한 번 더 자리를 마련 해 보기로 했다. 그때는 좀 계획성 있게 준비를 해서 짧게 온천 여행이라도 다녀올까 싶다.

2011/06/22 00:53 2011/06/22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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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에서 한국 조직 문화의 시작과 끝을 모두 볼 수 있는 것 같다. 권력이라는 게 뭔지도 조금 알 것 같다. 사람들이 왜 권력을 그토록 원하는지도. 나는 한 번도 내 삶이 통째로 어떤 조직에 종속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 그런 식으로 삶을 설계한 적이 없다. 하기야 자유분방한 20대에게는 이게 당연한 건지도 모르지.

오늘 어쩌면 충주에서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레슨을 받고 왔다. 헤아려보니 26번째 레슨이었다. 작년 9월 무렵부터 레슨을 받기 시작했으니 얼추 10개월 가까이 됐네. 요즘 이런저런 일들로 바쁘다보니 나도 좀처럼 악기를 만지지 못 해서 레슨 받을 입장이 아니었고, 마지막일지도 모르니 어수선해서 앙상블이나 좀 맞추다 끝냈다. 충주 시민 오케스트라는 결국 분열되어서, 원년 멤버들이 떨어져 나와 동호회를 만들었다는군. 내가 진작 돈줄을 쥐고 있는 쪽의 뜻대로 될 거라고 했건만, 사람이 중요하고 어쩌고 하더니……. 하지만 수준에 맞는 모습을 찾아간 것 같기도 하다.

토요일에는 서울에서 훈련소 동기들을 좀 만나게 될 것 같다. 동기 한 명이 전화를 했는데, 다짜고짜 죽겠다고 하소연이다. 죽겠다는 사람이 멀리도 아니고 바로 내 옆방에도 한 명 있지만……. 저마다 무슨 애환을 그렇게 지고 살아가는지. 너무 쉽게 쉽게 살아가는 내쪽에 문제가 있는 건가.

2011/06/17 02:40 2011/06/17 0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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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무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부대 마트에 들러 빵과 우유를 샀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허기부터 달랬다. 어제 체력검정으로 땀범벅이 된 몸을 씻지도 못 한 채 근무를 섰다. 개운하게 샤워를 했다. 정신이 몽롱하다. 그대로 침대 위로 몸을 던져 잠들었다.

깨어보니 오후 3시. 무슨 바람인지 시장 구경이 하고 싶어졌다. 바이올린 레슨 받으러 가는 길에 늘 재래시장 입구를 지나쳤다. 하지만 한 번도 그 안으로 들어가 본 일이 없다. 앞으로 내가 충주에 얼마나 더 머물지도 알 수 없는 일. 마음이 생겼을 때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늘 차로 지나치기만 했던 그 입구 안으로 들어가 보는 일을 말이다.

시장 입구 근처에 무료로 개방된 공용 주차장이 있어 차를 댔다. 아치형 입구를 지나, 새로운 세상으로 발을 내딛었다. 차를 타고 지나칠 때에는 그냥 조그만 먹자골목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 골목은 생각보다 깊었고, 여러 갈래로 샛길이 나 있어서 그 샛길을 빠져나갈 때마다 새로운 시장 골목이 나타났다. 입구 안쪽의 세상은,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토요일 오후인데도 시장은 한산했다. 상인들도 별로 장사할 의지가 없는지 자기 가게는 비워두고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를 떨거나 괜히 물건을 정리하거나 아예 널브러져 낮잠을 자고 있기도 했다. 옆구리 커다란 카메라를 끼고 있는, 누가 보더라도 관광객 티가 나는 나를 시선으로 쫓는 사람도 간혹 있었지만, 대부분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어차피 물건을 사줄 것 같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쌉싸래한 냄새가 풍기는 약초 가게 앞에는 나무껍질이며 뿌리며 버섯, 녹각(鹿角) 같은 약재가 잔뜩 펼쳐져 있었다. 기름 짜는 방앗간 앞에서는 고소한 깨 냄새. 어름판 위의 오징어가 싱싱해 보이는 어시장에서는 생선 비린내. 시장 안은 온갖 냄새들로 가득했다.

시장 구경을 하다 보니 허기가 졌다. 마침 순대 골목으로 들어섰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아주머니에게 국밥 한 그릇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이것저것 다 넣어드려?”하기에, “예 이것저것 다 넣어주세요.”했다. 그랬더니 정말 뭐가 뭔지도 모를 것들이 산처럼 수북이 쌓인 순대 국밥 한 그릇 내어준다. 다데기와 파를 잔뜩 푸니, 국물이 얼큰하다. 냉장고에서 꺼내준 물통은 가만 보니까 원래 우유를 담는 페트병이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노르스름한 차는 시원하고 고소하다. 소주병 수거하는 아저씨가 지나가니 아주머니가 불러 세운다. 몇 개 안 되는 소주병을 내어주며 투덜거린다. “토요일인데 손님 쥐뿔도 없어.” 앞에 혼자 앉아서 국밥 먹고 있는 손님 머쓱하다. 그래도 간혹 한 두 사람 지나가며 순대를 포장 해 간다. 1인분을 사든 2인분을 사든, 어째 봉투 가득 담아주는 건 비슷해 보인다. 우거짓국 한 바가지는 서비스인가 보다. 국밥 한 그릇을 뚝딱했다. 배때기가 찢어질 것 같다. 계산을 하고 다시 이 골목 저 골목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곳은 마치 과거에서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어떤 가게에는 20년 전쯤 김혜수가 찍은 듯한 광고 포스터가 그대로 붙어있기도 했다. 시장의 옷들은 어느 것이나 하늘하늘한 원단에, 색은 선명한 원색이고 꼭 화려한 꽃무늬나 땡땡이 무늬가 들어가 있다. 이건 ‘파리양행’이나 ‘희정패션’이나 마찬가지다. ‘상회’니 ‘상사’니 하는, 예스러운 이름의 가게들도 많았다. 도대체 뭘 파나 싶었지만, 대중이 없었다. 어떤 가게는 과일을 팔고, 어떤 가게는 곡식을 팔고, 어떤 가게는 잡화를 팔았다. 한여름 시장 골목에 햇빛을 가려줄 천막을 파는 천막사, 저울만 파는 저울가게, 냄비만 파는 그릇가게 등 뭐 이런 걸로 장사가 될까 싶은 가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가게들을 한데 모아놓으면, 그 어떤 대형 슈퍼마켓보다도 더 다양한 상품들의 집합소가 된다.

재래시장(在來市場). 우리는 이런 시장을 재래시장이라고 부른다. 재래(在來)란 말은 예전부터 있어 왔다는 뜻이다. 예전부터 있었는데, 그걸 새삼스럽게 이름 지어 부르는 게 이상하다. 나중에 생긴 시장은 뭐라고 부르나? 아니, 백화점이나 슈퍼마켓도 시장이라고 부를 수 있나? 허연 냉기를 풍풍 내뿜는 냉장 진열대에 깨끗이 정돈된 야채들을, 여기서는 볼 수가 없다. 그저 한 아름씩 묶어서 여기저기에 널브러뜨려 놨다. 간판은 공업사라고 달려있는데, 들여다보면 하고 있는 일은 냄비를 두드려 펴는 거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보며 향수를 느낀다고 하는데, 나에게는 모든 게 낯선 풍경일 뿐이다.

예전에 일본의 어떤 프로그램을 보는데, 개그 콤비가 나와서 과거의 코미디를 재현했다. 나이 좀 있는 방송인들은 갈채를 보냈는데, 그때 한 젊은 여자 출연자가 덩달아 “참 그리운 코미디군요”하고 한 마디 거들었다. 그러자 다른 출연자들이 놀라며 “아니 이런 개그를 본 적이 있어요?”라고 물었는데, 여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보니 전 본 적이 없네요.”

자기가 경험하지 않았어도 예스러운 것을 보면 자연스럽게 그리움을 느낄까? 벌써 10년 전의 일이지만, 영화 ‘친구’가 개봉했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그 영화를 통해 과거의 향수를 느꼈다고 했다. 나도 그 영화를 봤지만,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대를 살지 않은 나는 그런 향수를 느낄 수 없었다.

내가 자란 과천이라는 도시에는 ‘굴다리 시장’이라고 하는 재래시장 비슷한 것이 있었다. 그러나 굴다리 시장은 야채나 과일, 고기, 생선 따위의 식재료를 파는, 좌판 보다 별로 나을 것도 없는 천막 상점이 늘어선 작은 골목 시장일 뿐이었다. 외할머니는 닭백숙을 해주실 때에는 늘 굴다리 시장에서 닭을 사오셨지만, 난 엄마와 장을 보러 갈 때는 늘 뉴코아로 갔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에게도 향수라는 게 존재할까. 나에게 재래시장은 오히려 낯설고, 신선한 구경거리다. 이 시대에는, 재래시장에서 향수를 느끼는 세대와 재래시장을 낯설고 신기하게 생각하는 세대가 공존하고 있다. 그런데 토요일 오후임에도 쥐뿔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어디에 있을까? 국밥집 아줌마는, 그리움 가득 담긴 카메라 렌즈 같은 눈으로 시장을 배회하는 사람이나 나 같이 낯선 풍경을 찾아다니는 관광객이 아니라, 배고프면 시장을 찾아 한 끼 식사를 해결하는 손님을 기다릴 텐데 말이다.

2011/06/12 03:23 2011/06/12 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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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는 산책을 하면서 머릿속에서 단편소설 한 편을 써낼 수 있었다. 산책을 끝마치고 돌아왔을 때 남은 일은, 구상이 끝난 소설을 문자로 옮기는 것뿐이었다.

내가 감히 보르헤스를 흉내 내는 것은 아니지만, 나 역시 글을 쓸 때는 머릿속에서 구상했다가 한 번에 써내려가는 스타일이다. 앉은 자리에서 끝내지 못 하면, 좀처럼 다음 날 이어가지 못 하는 나쁜 습성이 있다. 그래서 많은 글들을 구상 단계에서 포기해버렸거나 혹은 쓰다가 중도에 멈추고 말았다.

유년 시절 이미 도서관을 통째로 머릿속에 집어넣었고, 곧 시력을 잃어서 평생 자기 내부의 재료들을 찬찬히 살필 여유가 있었던 보르헤스와 달리, 독서로 쌓은 밑천도 일천하고 시각적 유혹에도 약해서 쓸데없는 것들에 정신이 팔리기 일쑤인 나는, 보다 집중력과 인내심을 기르지 않으면 평생 글다운 글은 한 편도 쓰지 못 한 채 죽어버릴 것만 같다.

집중력과 인내심, 체력은 글을 완성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들인 것 같다. 훈련이 필요하다.

2011/06/10 00:56 2011/06/10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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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은 나에 대하여 거의 아는 것이 없다. 나의 1/100 만큼도 알지 못 한다. 마찬가지로 나 역시 타인에 대하여 그 사람의 1/100 만큼도 알지 못 한다. 사람들은 이처럼 서로에 대해 무지한 채로, 대다수가 공통적으로 겪는 보편적인 경험에 의지하여 서로를 이해하는 척 기만을 떨거나 무례하게 충고를 내던지고는 한다. 27살의 애 엄마가 나에게 사랑에 대해 충고하는 기막힌 일은, 이렇게 일어난다.

이런 바보 같은 일들은 하루 이틀 반복되어 온 것이 아니다. 앞으로도 나는 남에게 충고를 하고 싶어 안달하는, 나보다 한두 살 많은 사람들과 수도 없이 마주해야 할 것이다. 사람에게는 간사한 마음이 있다. 누구나 자기가 남들보다 우월하며, 자기 경험이 보다 존중 받을 가치가 있다는 착각을 품게 된다. 이런 착각은 습지의 독버섯처럼 성장하여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한다. 다양성이 제거되고 ‘차이’에 대한 관용이 소멸된 사회에서 이 독버섯은 훨씬 유해하다. 사람들이 저마다 인생이란 다 비슷비슷한 것이라고 여기게 되면, 자신의 우월성을 관철하고 기만적인 자기만족에 빠질 기회라는 것은 선(先)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만 얻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10년 먼저 태어난 사람은 10년 먼저 죽는다. 먼저 죽는 사람은 나중에 죽을 사람이 더 보고 누리고 경험하는 삶에 대한 어떠한 소유권도 주장할 수가 없다. 역사가 그의 죽음으로써 막을 내리게 되는 가련한 인간들은, 자신의 삶이 뭇 사람들로부터 경배 받을 수 있는 신화로 남기를 바라지만, 결국 그 자신이 자기보다 먼저 죽을 사람들의 얘기에 귀 기울이지 않았던 것처럼, 후배들은 자기보다 먼저 늙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결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나에게, 자기가 얼마나 다양한 경험을 쌓았는가를 열심히 주장하는 사람은, 자기가 앞으로 얼마나 다양한 경험을 할 것인가 하는 포부를 밝히는 사람보다 훨씬 덜 매력적이다. 초등학교 시절 장래 희망을 쓴 이후로는, 사람들은 줄곧 미래보다는 과거를 이야기하고, 포장하고, 신성시한다. 무언가를 하겠다고 말하지 않고, 무언가를 했노라고 말하는 사람은, 이미 무덤에 들어갈 준비가 끝난 사람이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이미 깨우친 사람은, 이승이 아니라 천국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다.

애써 젊은 시절에 자기의 인생을 남 앞에서 자랑하는 것은, 가련할 뿐 의미가 없는 행위다. 서글프게도, 결국 죽을 무렵에 이르러 그의 삶을 칭찬하고 본받고자 하는 이가 없다면, 그 삶은 별로 칭송 받을 만한 점이 없는 그저 그런 인생인 것이다. 나는 감히 부끄러워서, 손자 앞에서도 내 인생을 자랑하지는 못 할 것 같다.

2011/06/02 00:37 2011/06/02 00: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