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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초니에레 中 85번째 시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이상엽 역
                      

VERMEER, Johannes, Girl Reading a Letter at an Open Window, 1657, Oil on canvas, 83 x 64,5 cm, Gemaldegalerie, Dresden

나는 한결같이 사랑했고, 지금도 더없이 사랑하오,
또 그 사랑은 하루하루 더 커져만 가니
그 달콤한 곳, 사랑이 내 가슴을 옥죄어 올 때,
수없이 울며 돌아오는 곳이라오.

또한 나는 변함없이 그때, 그 순간을 사랑하오
볼품없는 모든 사념들까지 떠올리면서,
또 그 아름다운 얼굴은 그것을 더욱더
그 보기와 더불어 잘되도록 하는 마음을 내게 갖게 한다오.

하지만 이전에 그 누구인들 보리라 생각했던가?
내가 몹시도 사랑하는 이 다정한 적들이, 사방에서
모두 함께, 내 마음을 빼앗아가려는 것을,
사랑아, 너는 지금 크고 큰 힘으로 날 압도해 오는구나!

그러나 내 바람대로 희망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나 쓰러져 죽으리오, 살고자 하는 열망이 이리도 큰 때에.

2012/01/03 00:51 2012/01/03 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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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죽는다.
2011/12/19 22:28 2011/12/19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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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서재/독서노트

[표지] 카이사르 : 제국을 만든 남자



대상이 살아있는 사람이든 이미 죽은 사람이든, 작가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 대해 글을 쓴다면 그 이유는 대개 다음의 두 가지 중 하나이다. 그 사람을 사랑하든가 혹은 증오하든가. 물론 사회가 어린이들에게 습득시키고자 하는 구태의연한 도덕률이 위인들의 업적에 뻔뻔스럽게 덧칠되어있는 고리타분한 위인전 시리즈는 예외이겠지만.

다소 지루하게 쓰인 학술적 역사서라 하더라도 그 안에는 그 시대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저자의 애정이 담겨있기 마련이다(혹은 억눌러져있으나 서슬 퍼런 울분이 담겨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글의 행간에서 단지 활자화된 것 이상의 것을 아무 것도 읽어낼 수가 없다면, 다시 말해 감정에 호소 해 오는 목소리가 없다면 그 글은 숱한 학생들이 억지로 써 내야만 했던 대학 과제물과 다를 바 없는 ‘죽은 글’이다.

저자가 까닭도 없이 고른 시대와 인물에 대해 그저 사실만 나열해 놓은 그런 무미건조한 책을 읽는 것은 시간의 낭비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책의 서두에 너무나도 당당하게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공정한 시각에서 서술하기 위해 노력했다”라는 식의 글을 써놓은 것을 보면 더 이상 책장을 넘기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우리가 어느 한 시대나 한 인물에 대해 평생 한 권의 책만 읽을 수 있다면 모든 가치 판단은 독자에게 맡겨버린 채 저울처럼 공평하게 서술 된 책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격렬한 애정이야말로 모든 위대한 문학의 어머니요, 끓어오르는 울분이야말로 모든 위대한 역사서의 토대다. 우리는 작가와 서술의 대상 사이의 애증의 관계 속으로 헤집고 들어가 우리의 위치를 정할 필요가 있다. 단지 지식을 얻는 것만이 아니라 역시 사랑하고 분노하는 것, 그것이 곧 독서의 가치이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그는 살아있었을 적에나 죽은 지 2000년도 더 지난 지금에나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증오를 동시에 받는 인물이다. 다만 민주주의 이념이 보편화되어버린 지금에는 카이사르의 결점을 지탄할 만한 뚜렷한 동기가 없어졌기 때문인지(오히려 독재자를 그리워하는 경향마저 눈에 띈다), 현대의 카이사르는 리더십을 칭송 받는 역사적 영웅으로서, 매끄럽지만 다소 밋밋한 캐릭터가 되어버린 감이 있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현대적 재해석에는 언제나 논란의 여지가 있다. 우리가 카이사르로부터 무얼 배워야하는지, 그의 일대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생각하는 행위는, 카이사르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마치 성경속의 우화처럼 느껴지게끔 한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우화 속의 인물이 아니라 실존한 인물이다. 그가 제국을 이룬 업적은 일개 기업의 성공 스토리와 비교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의 관용과 응징은 부하 직원의 실수를 용서하느냐 마느냐하는 가벼운 문제와는 차원이 다르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관용에 배신으로 응수한 부족에 대하여, 전 부족민의 팔을 잘라버리는 것으로 응징했다. 카이사르의 도박은 전 재산을 거는 것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그는 개인의 멸망과 조국의 파멸을 저울질 했다. 그리고는 자신 한 사람의 파멸 대신 로마 전역을 로마 시민과 원로원의 피로 물들이는 쪽을 선택했다.

카이사르의 이런 생생한 이야기 속으로 우리를 안내해 줄 안내자들은 사실 너무 많다. 우선 카이사르 자신이 『갈리아 전기』와 『내전기』라는 너무나도 훌륭한 안내서를 남겼다. 그러나 이 두 권의 책은 카이사르가 당대의 로마인들에게 읽힐 목적으로 쓴 것이기 때문에, 로마의 역사와 전쟁 이전, 이후에 얽힌 카이사르의 행적을 제대로 알지 못 하는 오늘날의 상당수 독자들에게는 입문서로 적절치 않다.

필립 프리먼의 『카이사르 : 제국을 만든 남자』는 카이사르가 태어난 시점부터 그가 죽을 때까지 약 56년간의 이야기를 속도감 있게 펼쳐 보이는데, 카이사르 개인의 행적뿐만 아니라 말기에 접어든 공화국 로마의 전반적인 역사도 함께 개괄 해 나간다. 서술은 다소 밋밋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카이사르라는 인물의 생애가 워낙 흥미진진하기 때문에 그 점은 보상 받고 있다.

저자는 자신의 라틴어 수업 시간에 지루해하는 학생들의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해 종종 카이사르 이야기를 하곤 했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은 “이 뛰어난 인물과 그가 살았던 세계를 좀 더 자세히 알려고 하는 이들에게 카이사르의 삶과 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는 열망에서 이 책을 집필하였노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한 구석에는 “카이사르를 지나치게 칭송하고 싶지도 않거니와 역사상 수많은 독재자들 사이에 묻어버리고 싶지도 않다”고 못 밖아 놓기도 했다. 이런 작가의 정신상태 때문인지, 그의 저작 속 카이사르는 다소 변덕쟁이로 비춰지기도 한다. 그의 목에 칼을 들이 댄 정적들까지 용서하고 요직에 앉힌 ‘관대한 카이사르’와 죽은 사람을 깎아내리기 위해 3류 타블로이드 지처럼 온갖 유언비어와 원색적 비난으로 가득 찬 책을 출판한 ‘비겁한 카이사르’는 어쩐지 동일 인물처럼 여겨지지 않기까지 한다. 저자는 카이사르의 이런 행위의 불일치에 대해서는 그리 심각하지 않은 태도로 ‘이것은 관용, 저것은 실수’라는 식으로 해석하고 넘어간다.

이 책은 명료하며 이해하기 쉽다. 혼란스러웠던 당시 로마의 역사에 대한 개괄적인 지식을 얻기에 적절하다. 더불어 서술의 저변에는 카이사르에 대한 저자의 호의가 깔려있다. 비록 저자 자신은 최대한 객관적인 입장을 견지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전문적인 역사 연구가도 아닌 고전 언어학자가 자기의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때때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도 모자라 책까지 펼쳐냈을 정도라면, 카이사르에 대한 저자의 ‘애정’을 의심할 수는 없으리라. 다만 이 러브 스토리는 다소 미적지근하다. 그래서 카이사르가 암살당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되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도 가슴 속에 열광적인 무언가가 끓어오르지는 않는다. 카이사르와 함께 그토록 바쁜 여정을 달려왔는데, 그 여정이 끝났을 때에 조금도 숨이 가쁘지 않다면, 역사의 오락적 측면을 달성하는 데에는 성공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전쟁이나 혹은 전쟁보다도 더 치열했던 정치전에 대한 묘사도 다소 긴장감이 떨어진다. 그것은 구태여 과장은 하지 않겠다는 저자의 자제심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디테일을 많이 생략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 얇지는 않더라도 한 권의 책에 한 인물의 생애를 통째로 담으려다보니 아무래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만, 역사상 이렇게 사료가 풍부한 시대도 달리 없는 만큼 그 색채감을 선명하게 살리지 못한 것은 아쉽다.

추가적인 탐구의 욕구를 일으키지 않는 어설픈 만족감은, 약간 균형을 잃은 격렬한 열망보다 위험하다. 저자는 카이사르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다고 하지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또 그것을 해결하는 것도 이 한 권의 책이 모두 짊어진 채로, ‘카이사르는 대충 이런 사람이었습니다’라는 이미지만 독자의 머릿속에 심어주고 끝나버린다면, 그건 애초의 의도와는 상반된 결과일 것이다.

총평의 의미로, 이 책의 의도와 가치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독자들이 자발적인 의지로 카이사르의 육성이 담긴 『갈리아 전기』나 『내전기』, 그밖에 키케로의 『서간집』을 비롯한 당대의 기록들, 그리고 수많은 다른 역사서에 대한 탐구를 위해 한 걸음 내딛어야 할 것이라는 개인적인 소감을 적으며 마무리한다.

2011/12/06 00:20 2011/12/06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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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부터 연습실에 바수니스트가 출몰하고 있다. 현재 실력으로 봐선 시작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 같은데, 바순을 취미로 하는 사람은 '없고' 나이도 어려 봬는 것으로 봐서 뒤늦게 음대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이 아닌가 싶다. 오늘은 바순 선생님까지 출몰해서 쌍으로 바순을 부는 진기한 풍경을 목격 했다. 바순 연주도 아니고 바순 레슨이라니, 정말 희귀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어제까지 휴가였기 때문에 월요병은 피했다고 생각했지만, 나흘간의 휴식 뒤 출근에는 그런 만만한(일본어あまい에 해당하는 단어가 한참동안 생각나지 않았다!) 생각이 통하지 않았다. 지루하고 숨 막히는 근무 시간. 천근만근 피로. 방에 돌아와 그대로 쓰러져 눈을 붙였으나, 그래도 기어이 일어나 연습실로 가서 바이올린 연습 1시간 하고 운동도 하고 왔다.

역시 금, 토, 일, 월 나흘을 쉬었더니(물론 금요일에는 등산을 했지만) 몸이 무거워졌다. 잽이 이렇게 둔해지다니. 훅과 어퍼컷은 여전히 스피드보다는 자세에 중점을 두고 연습. 어느 새 복싱을 시작한 지 3달째를 맞이했다. 물론 첫 달은 1주일 나가고 말았으니 다닌 거라고 말할 수도 없지만. 10월 한 달은 주 최소 3회 이상, 보통 4회 정도 꾸준히 나가 운동했다. 결과적으로 몸이 좀 가벼워졌고, 소화가 잘 된다. 적게 자더라도 훨씬 개운하다.

내일은 3주 만의 레슨. 하지만 회식이 있다는데! 이번에는 또 무슨 핑계를 대고 빠지나.

주말에 사진 찍으러 가고 싶은데, 또 산에 가기에는 너무 부담스럽고, 단풍도 이미 졌으니 서울 시내에 산책하기 좋은 길이나 좀 찾아봐야겠다. 이참에 오랜 숙원이었던 서울 역사 탐방이나 시작 해 볼까.

2011/11/09 01:06 2011/11/09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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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봉 정상


내장산. 까치봉을 찍고 왔다.

사진 맛보기

2011/11/08 01:18 2011/11/08 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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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바이올린 연습

화요일, 오페라 감상 & 복싱

수요일, 등산 & 바이올린 연습

목요일, 복싱

내일은 내장산에 간다. 원래 4인 팀을 구성했지만, 한 명씩 탈락하다가 결국 나 혼자 남게 되었다. 모처럼 휴가를 냈는데, 낭비할 수 없어 혼자서라도 간다. 1주일 사이에 세 번째 등산이다. 나처럼 등산 싫어하는 사람도 드물 텐데, 그놈의 사진이 뭔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신발을 새로 샀다. 뭣도 모르고 가벼운 런닝화 신고서 산에 올랐다가 발이 만신창이 됐다. 평소에 구두만 신고 다녔는데, 앞으로 이 신발 신고 부지런히 사진 찍으러 다녀야겠다.

2011/11/04 01:38 2011/11/04 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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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들녘

가을 걷이가 아직 끝나지 않은 논.

코스모스

코스모스.


2011/11/03 00:54 2011/11/03 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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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두 시. 오군이 내려왔다. 안주거리로 만두를 놓고 술을 몇 잔 했다. 드람뷔를 개봉했다. 달콤한 맛에 쌉싸래한 허브향이 감돈다. 위스키와 섞어 러스티 네일을 만들어 한잔 더 마셨다. 위스키 하이볼에 쿠앵트로. 적고 보니 그리 적게 마신 건 아닌 듯하다. 안주거리는 떨어져도 이야깃거리는 떨어지지 않는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야기는 이어진다. 새벽 4시를 넘겨, 겨우 자리를 정리했다.

술을 마시면 오히려 잠 못 이루는 나는, 이리저리 뒤척이다 겨우 잠들었다. 아침 10시를 훌쩍 넘겨, 창문을 톡톡 두드리는 심상치 않은 소리에 깼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여유롭게 출발하기로 했다. 아침 겸 점심 메뉴는 순대국밥으로 정했다. 밥이 말아져서 나오는 건 5,500원인데 밥 따로 나오는 건 6,000원이란다.

12시, 갑사(甲寺)를 향해 출발했다. 아직 비는 완전히 멎지 않았고, 길 위엔 짙은 안개가 내려 앉아 있었다.

등산로 입구에서는 아직 등산도 시작 안 한 우리들에게 식사하고 가라며 호객 행위를 하는 음식점 주인들이 제법 극성이었다. 아랑곳 않고 입구로 들어섰다. 궂은 날씨 탓인지, 아니면 다소 늦은 시간대여서였는지 등산로는 우려했던 만큼 붐비지는 않았다.

코스는 갑사에서 금잔디 고개를 지나 삼불봉으로 가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늦게 출발하기도 했고, 중간 중간 사진을 찍느라 시간이 너무 많이 지체되어서 금잔디 고개에서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하산을 시작 할 때에는 이미 해가 기울어서, 내려왔을 때에는 완전히 어두워져 버렸다. 산 속에서 30분만 더 시간을 지체했더라면 큰 일 났을 뻔했다.

계룡산의 단풍은 기대했던 것만큼 아름답지는 않았다. 올 해 단풍은, 늦더위와 가뭄 때문에 색이 예년만큼 예쁘지는 않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아무튼 추갑사(秋甲寺)란 명성이 다소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봉우리에서 단풍 곱게 든 산의 모습을 굽어보지 못 한 건 아쉬움으로 남지만, 끝까지 올라갔더라도 아무 것도 보지 못 했을지도 모른다. 금잔디 고개는 안개가 자욱해서 불과 10m 앞의 사물도 제대로 분간이 안 될 정도였으니까.


나무


계곡


폭포


오군+인물 스페셜


사진이 너무 많아서 용량을 줄이기 위해 작게 리사이즈 했더니, 역시 화질 손상이 심하다. 뭐 어쩔 수 없나.

2011/11/02 00:55 2011/11/02 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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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역사와 문학만이 삶의 위안. 다시 책으로 돌아가자…….

페르골레시의 스타바트 마테르가 가슴 깊이 들어온다. 처음 들었을 때는 좋아할 수 없었는데.

지난주부터 바이올린 연습을 꾸준히 하니, 조금씩 소리가 나아지고 있다. 역시 시간을 이길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연습 시간을 조금만 더 늘릴 수 있으면 좋겠는데, 안타깝게도 체력적인 한계를 느낀다.

복싱, 오늘은 드디어 훅을 배웠다. 팔의 각도가 직각이 되도록 하는 게 포인트.

40년쯤 살면 바보가 아닌 이상,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는 깨달을 수 있겠지. 그런 인간들의 냉소주의조차 우리는 식견이라 인정 해 주어야만 하나? 세상은 변한다. 더 이상 세상이 변치 않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매일 죽기 때문이지.

2011/10/28 00:48 2011/10/28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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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 한 번 잘못 한다고 해서 나라가 망하지는 않는다. 투표는 고사하고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정부가 들어선 적도 있지만, 이 나라는 망하지 않았다. 마치 한 번의 투표로 모든 미래가 결정되고, 한 번의 실수로 앞날이 절단날 것처럼 떠들어대는 후보자들의 말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정치라는 건 아주 이성적인 행위처럼 보이지만, 다분히 감정적인 행위이다. 그리고 선거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들에게 보장된 거의 유일한 합법적 분탕질의 기회다. 시민들이 기분 내키는 대로 자신들의 정부를 구성할 수 있다는 것이, 2차 세계대전 때보다도 더 많은 피를 흘리며 이룩한 혁명의 유일한 결과물이며,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내던지며 얻고자 하는 목표이다.

나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한 가지 점에서 대단히 경탄해 마지않는데, 그건 여전히 모택동의 초상화를 광장 한 복판에 걸어놓고 신처럼 숭배하는 일당지배국가 중국과, 3대 세습이라는 전근대적 독재 정치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북한과 인접 해 있으면서도 시민의 자발적 투표에 의한 정부의 구성이라는 민주정치의 기본 질서를 거의 완벽하게 실행하면서, 한국보다 100년 먼저 헌법을 제정하고 입헌국의 길을 걸은 일본보다도 한 발 앞서서 정권 교체까지 이룩한 점이다. 이론이 아니라 실제적 측면에서 투표라는 권리를 행사하고 그 결과까지 확인할 수 있었던 국가와 민족은 현대에조차 그리 많지 않다. 그런 점에서 볼 때에, 한국인들의 시민 의식은 상당히 성숙하다고 할 수 있다.

선거라는 것은 큰 틀에서, 시민들의 요구와 열망을 확인하고, 방향을 정하는 기회일 뿐이다. 그것을 어떻게 정책적으로 또 행정적으로 구체화 해 나갈 것인가는 선출자들이 임기 중에 고민할 문제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다음 선거’를 통해 평가 받게 될 것이다

이 흥미진진한 과정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은, 바로 시민이다.

2011/10/26 01:50 2011/10/26 0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