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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FG가 시작됐다. 난 원래 훈련 참석 대상자가 아니었는데, 오늘 아침 갑자기 훈련 인원에 공백이 생겼다면서 다짜고짜 나를 상황실에다가 앉혀놓았다. 이어서 시작된 무능한 자들의 핑퐁질. 너무 화가 나서 ‘모르겠습니다.’, ‘해 본 적이 없습니다.’로 일관하다가 그냥 뛰쳐나오려고 했는데, 타고난 성실성은 그런 걸 허락하지 않았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또 일은 하게 되어버리니.

12시간씩 2교대 근무로 2주간 지속 훈련이다. 오늘은 10시에 퇴근했다. 지난주에는 선생님 사정으로, 이번 주와 다음 주는 내 사정으로 레슨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내 인생이 어떤 식으로 낭비되고 있는지, 이런 때에 종종 깨닫는다. 대체 무얼하고 있느냐고 자신에게 묻는 날이면, 나도 조금은 우울해진다.

어제였나. 바렌 보임이 이끄는 서동시집 오케스트라가 국내에서 공연을 했다. 이번에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연주한다지. 어제의 프로그램은 합창 9번으로, TV에서 무려 새벽 1시에 녹화방송을 해줬다. 별로 끝까지 듣고 잘 생각은 없었는데, 결국 끝까지 다 듣고 말았다. 소프라노는 조수미. 소프라노가 그렇게 두드러지는 곡은 아님에도(그리고 비교적 카메라가 4명의 독창자를 고루 비춰주려고 노력했음에도), 조수미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한편 바렌 보임. 아, 그도 늙었다. 사람이 늙으면 눈빛이 변한다. 젊은 예술가의 시선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이상을 응시하고, 늙은 예술가의 시선은 내면의 추억과 회한을 쓰다듬는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출신의 음악가들이 모여 만든 이 기적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바렌 보임은, 어느 덧 자기가 걸어온 삶 속에 구축된 하나의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관객의 매너에 대해서 코멘트. 나는 악장과 악장 사이의 박수에 대해서는 관대한 편이다. 박수를 치지 않는 게 에티켓이기는 하나, 그것은 클래식 음악을 듣는 데에 있어서 어느 정도 수준이 되는 감상자들 사이에서나 통용이 되는 이야기다. 한국인에게 음악이란, 마음에 들면 언제든 박수칠 수 있고 아는 멜로디면 따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는 음악 감상의 자세에 있어서 야만하다고까지 칭해졌던 이탈리아인들과 기질이 비슷하다고도 볼 수 있겠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한국인들은 서양의 클래식도 모르거니와 동양의 고전도 모른다는 것(나도 동양의 고전 음악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에티켓을 알고 모르고를 떠나서 진지하게 마주하고 탐구하듯이 파고들어야만 즐길 수 있는 음악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음악을 듣는 자세가 어떠하고는 뭐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건 자기가 즐기는 음악의 속성을 알면 자연스럽게 체득되는 것이니까.

그래도 4악장 중간에 터져 나온 박수는 너무 심했잖아! 성남시향이 베토벤 9번 한 곡을 연주하는 동안 7번의 박수가 터져 나왔던 게 떠올랐다. 연주도 개판이었는데 그렇게 박수를 남발하는 건, 감동을 받아서가 아니라 강박이 있어서 그런 거 아니야?

어제는 3시간도 못 잤다. 지쳤다.

2011/08/16 23:45 2011/08/16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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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규칙적인 생활.

기상 - 출근 - 시간낭비 - 퇴근 - 쪽잠 - 바이올린 연습 - 음악 들으며 웹서핑 - 일기 및 기타 글쓰기 - 독서 - 잠

우피치 미술관에 화장실 청소부로 취직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 대한민국 공군 장교 노릇하는 것보다 하루하루가 보람찰 것 같은데.

연습실이 있다는 게 좋구나. 나는 보통 저녁 8시에서 10시 사이에 연습을 하는데, 아직까지 아무와도 마주친 일이 없다. 마치 내가 전세 낸 기분이다. 왕복 40분의 이동 시간은 좀 아깝긴 하지만, 충주 부대 안의 그 삭막한 강당에 비할 게 아니다. 푹신푹신한 소파도 있고, 상태 양호한(듯 보이는?) 피아노도 있고, 보면대도 놓여있고. 여긴 정말 음악 연습실이야!

이번 주는 선생님 사정으로 레슨이 없다. 다음 주에는 UFG가 시작되는데, 나는 딱히 할 일이 없지만 주 ? 야간 교대 근무를 설 가능성이 있어서 레슨 전망은 불투명하다. 뭐 남는 시간에 연습이나 열심히 해야지. 레슨 1 대비 연습량이 10 정도는 되어야 레슨 효과가 있는 것 같다.

지루하군…….

2011/08/11 01:23 2011/08/11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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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비록 많은 서양인들을 만나보지는 못 했지만, 그중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습된 관용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학습된 관용 정신이란 나와 다른 사고방식도 존중하는 이성적인 태도를 말한다. 이웃 나라와의 백년에 걸친 전쟁이나 구교와 신교의 피비린내 나는 종교 전쟁, 수천만의 목숨을 앗아가 버린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했던 세계 대전의 골조차도 극복하게 만드는 화합의 힘은, 내 생각을 조리 있게 내세울 수 있는 설득력과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자세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만나본 대부분의 서양인들이 관용의 대상에서 배제하고 있는 한 가지가 있다. 그건 ‘이슬람’이다. 요즘 서양 특히 유럽의 사람들은 이슬람에 대해 과거 십자군 전쟁 시대 못지않은 증오심 혹은 혐오를 표출하고 있다. 표면적으로 그것은 중동 사회의 정치적 불안정에 따른 다수의 난민 유입이 원인인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 유럽 사회는 전체 인구의 약 7%가 이슬람교도이다. 이들 중 대다수는 정치적, 경제적인 이유로 이슬람 국가에서 유럽으로 이주한 이주민들이다. 프랑스의 경우 이슬람 인구의 비율이 가파르게 증가하여 두 자리 수를 넘어섰다. 복지 혜택이 풍족한 스칸디나비아의 국가들에도 이슬람 난민들이 물밀듯이 들이치는 형국이다.

국가와 국가의 대립, 구교와 신교의 대립, 슬라브, 노르만, 게르만, 골, 유태인 등의 민족적 대립, 그리고 성적취향의 대립마저 극복할 것처럼 보였던 유럽 사회이지만, 거센 파도처럼 밀고 들어오는 이슬람에 대해서는 격렬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고 있다. 노르웨이에서는 이것이 테러라는 아주 극단적인 형태로 표출되기도 했다.

왜 이슬람은 유럽에서 관대하게 받아들여지지 못 할까. 비록 이슬람이 기독교 문명의 울타리 안에서 통합을 이루어온 유럽 사회의 시각에서 보자면 종교적, 인종적으로 멀리 떨어져있기는 하지만, 수천 년간 교회에서 박해를 받아온 동성애자나 유대인을 사회에서 추방하자는 의견이 여전히 존재한다고는 해도 정치적으로 큰 공감대를 얻지는 못 하는 상황에서, 유독 이슬람에 대해서만은 적개심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분위기인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유럽인들은 이런 현상의 원인이 이슬람쪽에 있다고 주장한다. 재밌는 것은, 유럽인들의 입장에 서면 당연하게 들릴 이 주장이, 비유럽권에서도 공감을 얻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테러에 대한 반감 때문만은 아니다. 아시아인인 우리에게도 이슬람은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이다.

얼마 전, 이란의 여자 축구 대표팀이 국제 경기에 히잡을 쓴 채로 출전했다가 복장 규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몰수패를 당한 일이 있었다. 전 세계인의 스포츠인 축구에서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진 데에 대하여, 보수적인 협회측을 비난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국제 경기의 룰을 지키지 않고 끝까지 히잡을 고집하는 이란팀을 이해하지 못 했다. 사실 이런 여자 축구 대표팀의 사정을 들여다보면 사정은 딱하다. 이란은 여전히 극단적인 원리주의자들이 정권을 잡고 있으며, 국가의 법률은 종교적 교리의 테두리 안에서 성립하고 있다. 만일 이란 여자 축구 대표팀이 국제 경기 규칙을 지키기 위해 히잡을 벗어버렸다면, 경기는 진행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조국으로 돌아갔을 때에 그 팀이 존속하지 못 할 가능성은 물론이거니와 수많은 광신적 남성들의 폭력으로부터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우려까지 있었다.

문제는 이것이다. 이슬람은 여전히 종교 중심적인 사회다. 즉 사회의 구성원들이 종교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불과 두 세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유럽 사회도 다를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근대의 사상가들은 근대 국가의 법률과 종교상의 교리를 분리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래야만 했던 이유는, 근대 국가를 설립시키는 데에 있어서 종교가 내포하고 있는 위험성을 그대로 떠안고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종교는 그 어떤 철학보다도 강하게 가치 판단의 기준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 기준이 성립하는 합리적인 근거는 제시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 중심의 사회에서는 성직자들의 편익을 위해 신자들을 희생시켜도 그것의 불합리성을 지적할 수가 없다. 교리는 위에서 아래로 향할 때는 성직자들의 입맛에 맞게 해석되지만, 아래에서 위로 향할 때에는 절대성을 부여 받아 결코 비판될 수 없는 것이다.

루소도 사회계약론에서 국가 전체의 이익과 교회의 이익은 완전히 합치될 수 없기 때문에, 교회가 정치의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시민 혁명기의 사상가들은 완전한 이성에 의한 국가를 꿈꾸었기 때문에 종교적 비합리성을 근절시키기 바랐고, 프랑스의 혁명 정부는 유럽 사회를 교회와 단절시키려는 시도도 했다. 그들은 심지어 ‘일요일’을 없애기 위해서 한 주를 열흘로 바꿔버리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 시도는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 했지만, 오늘날 유럽인들은 여전히 많은 수가 기독교 신자이고, 교회를 나감에도 불구하고 종교가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가치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교리가 낳은 편견에 사로잡혀서 합리적이지 않은, 그리고 공공의 이익에 합치되지 않는 주장을 제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태도로 간주 된다. 동성애는 종교적 관점에서 보면 죄악일 수 있지만, 민주적 관점에서 보면 개인의 선택의 문제다. 교회는 여전히 피임과 낙태에 대해 반대하지만, 사회적으로는 그것들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것이 인정된다.

유럽에서 종교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보다 축소된 영역에서 자기의 역할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죽은 후의 세계가 아닌, 지금 살아있는 세계에 관한 한 종교보다는 이성적은 토의, 합리적 근거에 기초한 법률,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권익을 보호하는 민주주의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런 인식이 저변에 깔려있기 때문에, 유럽 사회는 관용 정신을 교육할 수 있는 것이다.

이슬람은 확실히 덜 진보되었다. 이것은 밥을 숟가락으로 먹느냐 손으로 먹느냐 처럼 문화 상대주의의 관점에서 논할 대상이 아니다. 소수의 권력자가 비합리적인 사회 구조를 교모하게 이용하여 다수의 자유를 침해하고 이익을 독점하는 것은 어떤 문화의 산물로도 인정될 수 없다. 이란의 정치 지도자들은 공개적인 연설을 통해서 공공연하게 여성들의 사회생활을 비난한다. 남자들은 여러 여자들을 아내로 삼지만, 남편이 있으면서 다른 남자와 관계한 여자는 돌팔매질을 당해 죽는다. 이것이 한 사회의 문화로 법률로 도덕으로 정당화 될 수 있을까?

유럽으로 밀려드는 무슬림들은 서구의 합리적인 가치관을 선택했기 때문에 이민을 간 것이 아니다. 정치적 불안정과 경제적 궁핍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주를 한 것이다. 이 이슬람인들은 유럽으로 치면 중세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고서 현대 사회로 뛰어든 것이나 다름없다. 그들은 주어지는 사회보장 혜택을 마다하지 않지만,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과 무관한 그 어떤 시민의 의무도 수행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합리적인 사고와 관용의 정신은, 종교적 배타주의에 젖어든 그들에게 기대할 수 없는 것들이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유럽의 관용 정신이 그들을 포용할 수가 없다.

하지만 유럽 사회가 무슬림들에 의해 이슬람화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지나친 감이 있다. 머지않아 무슬림들도 종교적 광신에서 벗어나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를 배우는 것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 첨병은, 지금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유럽 사회의 이슬람들이 될 것이며, 그 중에서도 특히 여성들이 앞장서게 될 것이다. 유럽은 일, 이백년이나 앞서서 이것을 이뤄냈지만, 인류의 장대한 역사에서 보자면 겨우 진보의 한 걸음을 먼저 내딛었을 뿐이다.

2011/08/10 00:19 2011/08/10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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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으로 돌아왔다. 별 차이는 없지만, 부대 안으로 복귀하는 것보다 부대 밖의 내 방으로 돌아오는 게 기분이 덜 나쁘군. 아무튼 이 방은 철저히 나만의 공간이니까, 안정감이 있다.

여름휴가가 끝났다. 휴가를 이틀 이상 붙여서 쓴 건 이번이 처음이다. 나흘간의 휴가였는데, 늘 말하지만 난 한 번 놀면 보통 6개월씩 놀기 때문에 겨우 나흘은 노는 것 같지도 않다.

지난 목요일에는 유포니아 캠프에 놀러갔다. 아는 얼굴들을 많이 보려면 금요일에 가는 게 나을 수도 있었겠지만, 금요일 밤에는 리허설이 끝난 이후에 연주 참여자 전원이 홀에 빙 둘러앉아 촛불 하나씩 켜고서 각자 캠프 소감을 밝히는 이른바 ‘촛불의식’이라는 걸 하는데, 이게 끝나면 보통 새벽 3시쯤이라 놀기를 기대할 수가 없다.

이번에도 술을 좀 풀었다. 지난번에는 위스키에 와인, 맥주, 혼성주까지 다양하게 준비해갔지만, 이번에는 칵테일 쪽에 집중을 했다. 사람이 많기 때문에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이 짧고 양도 적은 슈터 재료만 가져갔는데, 이번에 선보인 것은 Alice in Wonderland, Alice in Dallas, Desert Skies, B-52 등 네 종류. 바이올린 파트 전원에게 한잔씩 돌리고도 술이 상당히 많이 남아서, 그냥 데킬라며 살구 브랜디며 자유롭게 마셨는데, 그러다보니 언제 취했는지도 모르게 가버린 사람도 몇 나왔다.

나는 유포니아 연주회에 세 번밖에 서지 못 했는데, 캠프는 여섯 번이나 갔다. 이제 연주를 서기 위해 참여한 캠프 횟수와 그냥 놀러간 캠프 횟수가 같아져버렸다. 놀기도 열심히 놀지만 힘들게 연습도 하는 단원들에게는 좀 미안한 생각도 든다. 솔직히 ‘선배’라는 입장으로 ‘격려’를 구실삼아 가긴 하지만, 그냥 내가 좋아서 놀러가는 거니까. 원래 나이를 먹을수록 더 어린 사람들과 놀고 싶어지는 법이다. 반면 선배를 상대해야 하는 후배 입장은 피곤하지.

아무튼 나는 말은 많이 하지 않고, 특히나 무슨 교훈적인 얘기나 훈계조의 얘기는 가능한 삼가고(잘 지켜졌는지는 모르겠다), 칵테일이나 열심히 만들어서 돌렸다. 잠은 거의 안 자고, 오전 연습을 참관했다. 저녁 리허설 점검을 위해서인지 전곡 전 악장을 다 통주(通奏)하고 연습도 했는데, 참관하는 입장에서는 즐거웠다.

오전 연습 때 집중력이 떨어져있다고 지휘자 선생님께 야단맞는 모습도 봤는데, 확실히 브람스는 좀 어수선한 감이 있었다. 브람스는 정말 앙상블이 좋아야 한다. 각각의 파트가 자기 몫만 충실히 할 게 아니라 다른 파트의 소리도 듣고 함께 합주할 수 있어야 교향곡의 인상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에게 브람스는 항상 버거운 상대이지. 하지만 방학 전부를 바쳐 함께 땀 흘리며 연습하는 유포니아니까, 연주 때는 좋은 앙상블을 들려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일본으로 어학연수 갔던 동생이 돌아왔다. 두 달 동안 하코다테에만 처박혀있었다니, 안타깝다. 언제 다시 홋카이도를 가게 될지 모르는데 돈이 문젠가. 나라면 열차를 타고 홋카이도 일주라도 했을 텐데.

일요일에는 캠프 때 소모해버린 술도 보충할 겸 남대문을 찾았으나, 수입시장은 일요일에 휴장. 결국 또 교보문고로 향했다. 요즘 사람들이 여름휴가를 서점으로 떠나는지 교보문고는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책 몇 권 고르고 사무실에서 심심풀이로 읽을 뉴스위크 일어판도 구입했다.

나흘만 출근하면 연휴다.

2011/08/09 01:58 2011/08/09 0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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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8월 3일, 첫 바이올린 레슨을 받았다. 만 6년이 지나 맞이한 2011년 8월 3일, 몇 번째인지 알 수 없는 바이올린 레슨을 받았다. 처음 바이올린을 들던 날, 최소 10년은 레슨을 그만두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목표로 했던 10년 중 여섯 번째 해가 지나가고, 이제 일곱 번째 해를 맞이했다. 처음 레슨을 받을 때는 만 19세였는데, 지금은 만 25세가 되었다. 그 기간 동안 생긴 굵직한 추억들은 대부분 바이올린과 관련되어 있다.

2006년, 일본으로 교환학생을 떠나기 전에 나는 바이올린 말고도 한 가지 더 배우는 게 있었다. 미술이었다. 미술은 바이올린처럼 10년 계획을 세우지는 않았지만, 여행을 다니며 풍경을 스케치 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 되는 것이 목표였다. 일본으로 간 후, 여러 여건상 바이올린과 미술을 모두 배우는 건 어려웠다. 결국 한 가지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은 오사카 대학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에 입단한 것이었다. 지금도 교수 면담을 위해 학교를 찾았다가 멀리서 들려오는 금관 소리에 이끌려 오케스트라 연습실을 찾았던 그 날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사양 말고 들어오세요.”라고 적혀있었지만 쉽사리 열 수만은 없었던 그 문 앞에서 끝끝내 돌아서버렸더라면, 그 이후 인생은 사뭇 달랐으리라. 오케스트라에 들어가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실은 혼자 고독하게 스케치북과 마주하는 미술 쪽이 나한테 더 잘 맞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번잡스러움으로부터 그저 도망만 쳤다면, 더불어 무언가를 함께 이루는 즐거움에 대해서는 영영 깨닫지 못 했겠지.

오늘 선생님이 이런 말을 했다. 성인이 되어서 바이올린을 시작하고, 6년이라는 시간 동안 꾸준히 배워서 모차르트 4번에 도전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에 이르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 했다고. 사실 난 6년 정도 배우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잘 연주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그거야 어쨌든 내가 레슨을, 무엇보다 악기 그 자체를 그만두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10년이라는 목표치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배우고 연주하는 과정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평생 이렇게 즐기며 살아가야지. 그리고 더 잘 즐기기 위해서 말인데, 제대하고 1년 정도, 바이올린 레슨만 집중적으로 받겠다는 건 빈말이 아니다. 아무리 취미 생활이라지만 설렁설렁 즐겁게만 해서는 ‘평생’이란 시간을 다 바쳐도 큰 성취를 이룰 수 없다. 결국은 고통과 인내는 무엇이든 값진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공통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2011/08/04 00:25 2011/08/04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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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분 대여료를 지불한 연습실에서 첫 바이올린 연습. 오늘도 학원에는 사람이 없고, 문은 잠겨있었다. 클라리넷과 색소폰 레슨이면 성인들도 꽤 수강 할 텐데, 저녁 수업이 없을까? 아무튼 나는 다시 고독한 연습을 시작했다.

두 시간 꽉 채운 연습에, 지쳐버렸다. 에어컨도 없는 무더운 학관에서 네 다섯 시간씩 지치지도 않고 연습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곁에 항상 함께 연습하는 다른 동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걸까(단순히 수업을 있는 대로 다 째고, 실컷 먹고 실컷 자고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6년 동안 악기를 하면서 이곳저곳 전전하며 연습을 했지만, 오사카 대학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의 아지트였던 학관이 가장 그립다. 거기서의 1년이, 내가 지금까지 악기를 그만두지 않고 계속하는 밑거름이 되었지. 오사카 대학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의 100회 공연 때는 꼭 보러가야겠다. 아마 오사카 심포니 홀을 대여해서, 성대하게 하겠지.

유포니아는 이번 주에 캠프라고 한다. 캠프하면 또 유포니아가 각별하지. 정말 사람 지치게 진을 빼놓지만, 그만큼 성취감이 있다고 해야 하나. 첫 캠프 마지막 밤 리허설 때가 기억나네. 말러를 연주하는데 얼마나 긴장했는지 그 겨울에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버렸다. 결국 리허설은 중간에 중지당하고 말았지만, 정말 연주하는 내내 짜릿짜릿했지. 이번 주 금요일과 다음 주 월요일 휴가를 낼 생각인데, 목요일쯤 캠프에 놀러가야겠다.

군 생활은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무료함’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일본어 통역으로 뽑혔고, 일본어 통역으로서 이미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군 생활에서 크게 기대하는 바가 없다. 사람들은 내가 평가 받을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 역시 남들을 평가한다. 내 시간과 나의 능력을 바쳐도 좋을 사람이, 주위에 없다.

내일은 두 번째 레슨.

2011/08/02 23:54 2011/08/02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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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에 도착한 이튿날, 날이 밝자마자 택시를 전세 내어 달려간 곳은,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약 30km 떨어져있으며, 고대 하(下) 이집트의 수도였던 멤피스의 북서쪽에 조성된 네크로폴리스, 곧 ‘죽은 자들의 도시’인 사카라였다. 이곳에는 인류의 역사를 되짚어 볼 때에, 가히 최초의 기념비적 석조 건축물이라 할 만한 위대한 건축물이 있다.

사카라의 피라미드로 가는 길에 있는 어느 매점 앞에서 발견한 '계단식 피라미드.' 시멘트 표면을 깎아서 지역 명물을 묘사해놨다.


바로 조세르 왕(재위 BC 2667 ~ 2648 추정)의 계단식 피라미드이다. 조세르 왕은 이집트 고왕국 시대(BC 2686 ~ 2181)를 연 제3 왕조의 첫 번째(혹은 두 번째?) 왕이었다. 그는 치세동안 시나이 반도로 원정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광산을 건설하여 터키석이나 구리 등을 채굴해 국부(國富)를 쌓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 조세르 왕의 생존 당시 업적을 우리는 구체적으로 추적할 수 없다. 게다가 그건 우리의 관심 밖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가 살아서 무엇을 했든, 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의 미라를 보관할 장소로 전대미문의 엄청난 무덤을 건축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인류 전체를 위한 역사 연표에 당당히 조세르의 이름을 올려놓을 만한 위대한 업적이었다.

무엇이 조세르 왕의 피라미드를 그토록 특별한 건축물로 인정받게 만들었는가? 그것은 이 피라미드가 ‘최초의 피라미드’이기 때문이다. 피라미드란 먼저 사각형의 토대를 잡고, 네 개의 측면을 삼각형으로 쌓아 올려 하나의 정점에서 만나도록 지은 방추형의 건물이다. 복잡한 변형이나 장식 없이, 기하학적으로 단순한 형태를 가진 이 방추형 건물은, 그러나 이집트의 메마르고 텅텅 비어있는 사막의 평원 위에 우뚝 서 있을 때에 배경과 더없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영화에서 또 만화에서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아름다움, 낭만, 모험, 위엄의 상징으로 끊임없이 등장했다. 가장 단순한 형태로 가장 완벽한 미를 완성한 피라미드의 시원(始原)을, 우리는 사카라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데 그 최초의 피라미드는 참으로 독특하게 생겼다. 물론 이것은 매끈한 사면(斜面)을 갖는 기자의 대 피라미드에 익숙한 오늘날 사람들의 관점에서 그렇다는 얘기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보면, 면적이 확연이 다른 몇 개의 단층을 쌓아올려 만든 이 계단식 피라미드는 어딘가 우스꽝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조세르 왕의 피라미드는 단지 외따로 세워진 건축물이 아니다. 이 피라미드는 면적이 45만 평방미터나 되는 넓은 부지에 대규모로 건축된 복합 묘역(Complex)의 핵심 건물이다. 이 묘역을 둘러싸고 있는 해자의 폭만 40미터에 달하고, 남북축을 따라 장방형으로 조성된 묘역의 남쪽은 낭떠러지에 면하고 있다. 묘역을 보호하는 주벽은 벽돌로 쌓아올렸는데, 무려 15개의 문이 있으나 그 중 단 하나의 문만이 묘역 내부로 통하는 진짜 문이다. 이 문은 남동쪽, 낭떠러지에 면한 모서리에 있다. 이 모든 복잡한 구조가, 묘역으로의 접근을 가능한 차단시키기 위한 조치였을 것이다. 비록 이런 모든 시도가 무색하리만치 무덤은 철저하게 도굴 당했지만 말이다.

남쪽의 진짜 입구를 통해 들어가면 주랑(柱廊)이 나온다. 이 긴 홀에는 높이가 6미터 정도 되는 20쌍의 석회암 기둥들이 늘어서 있는데, 특이한 것은 기둥들이 회랑의 외벽에서 분리되어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벽으로부터 길게 연장되어 서 있다는 점이다. 그건 아마도 원형의 기중 면적만으로는 지붕의 무게를 견디기에 충분치 않다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주랑

묘역으로 통하는 주랑

지금은 거의 허물어져버린(그러나 그 잔해들을 모아 절반의 높이쯤 복원해 놓은) 기둥들을 헤치고 주랑을 빠져나가면, 비로소 피라미드의 모습을 정면에서 확인할 수 있는 묘역 내부로 들어가게 된다. 그곳은 마치 거대한 운동장 같이 생겼다. 그리고 이 공간의 북쪽 부분에, 최초의 피라미드는 자리하고 있다.

피라미드

조세르 왕의 계단식 피라미드


조세르 왕의 피라미드는 최초의 피라미드로 불리지만, 물론 최초로 만들어진 왕의 무덤은 아니었고, 더욱이 최초의 대규모 석조 건물도 아니었다. 상 ? 하 이집트가 통합되고 파라오에 의한 중앙집권화가 진행되었던 이집트의 제1, 2왕조 시절 동안, 파라오의 미라를 매장할 거대한 무덤은 대를 거듭할수록 거대하게 완성되었다. 그 기본적인 형태는 대부분의 초기 문명에서 확인할 수 있는 거석 숭배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는 네모난 형태의 돌무덤이었다. 석관을 매장할 수 있는 매실을 지하에 마련하고, 그 위에는 권위를 나타내는 거대 규모의 돌무덤을 쌓는다. 재료는 보통 나일강변에서 채취한 진흙을 이집트의 강렬한 태양 아래 말려서 만든 벽돌이었다. 형태는 남북축을 중심으로 한 장방형으로, 천장을 향해 안쪽으로 비스듬히 경사가 졌으며, 윗면은 평평했다. 이러한 형태의 무덤을 ‘마스타바’라고 부르는데, 이 마스타바는 파라오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고대 이집트의 도시 아비도스에서는 많은 수의 마스타바가 발견되는데, 그 주인들은 파라오만이 아니라 이집트 사회의 엘리트 계층이었던 귀족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다. 이 마스타바 형태의 무덤은 왕국 이전 시기부터 제1, 2왕조시기에 걸쳐 규모가 확대되었을지언정 형태는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그런데 어째서 조세르 왕의시기에 이르러 갑작스럽게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을까?

조세르 왕의 피라미드는 모두 6층의 단층이 쌓아올려진 형태를 취하고 있다. 토대가 되는 1층은, 동서축으로 길이가 약 125m, 남북축으로 길이가 약 109m다. 특이한 점은 토대가 통상적으로 남북축을 갖는 이집트의 기존 건축물들과 달리 동서쪽으로 긴 동서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6층까지의 높이는 60m에 이른다.

내부 구조를 살펴본 결과, 이 계단식 피라미드는 단번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여러 번의 증축을 통해 완성되었음이 밝혀졌다. 최초의 건축물은 정방형의 마스타바였다. 그러나 이전까지 마스타바가 장방형이 아닌 정방형으로 건축된 사례가 없다는 점을 상기할 때에, 이것이 정말 마스타바였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어쨌든 이 정방형의 건축물은 이후에 동서쪽으로 확대되었고, 그런 다음 갑작스럽게(?) 4층 구조를 갖는 계단식 피라미드로 설계 변경되었다. 네 층 구조의 피라미드는 다시 여섯 층 구조의 피라미드로 개축되어, 최종 형태가 완성되었다.

마스타바에서 피라미드로 형태가 변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정설이라 할 만한 것이 없다. 사람들은 이 형태를 두고 ‘영원에 이르는 계단’이라고 부르지만, 그것이 태양을 향한 숭배라는 낭만적인 짐작 외에 뚜렷한 증거는 없다. 혹자는 이 형태가 특수한 조건 하에서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질 때에 일그러져 보이는 모양과 닮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처럼 계단식 피라미드의 기원에 대한 해답은 여전히 상상의 영역 속에 놓여있다.

건축상의 특이점을 몇 가지 더 살펴보면, 우선 이 피라미드는 건축의 주재료로 주로 진흙을 건조시켜 만든 벽돌을 사용했던 이전의 마스타바와 달리, 석회암 덩어리를 사용했다. 석회암을 절단한 모양이 마치 커다란 벽돌 같다는 점에서, 건축자들이 과거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려고 한 것은 분명하지만 재료가 진흙 벽돌에서 석회암으로 바뀐 것은 획기적인 진보라 할만 했다. 조세르는 역사 문헌에서 종종 ‘돌을 연자’로 표현되는데, 이는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6개의 층은 각기 피라미드의 중심을 향해 비스듬히 설계되었는데, 이는 건축물의 안정감을 크게 향상시켰다.

이 신비한 피라미드로 들어가는 입구는 피라미드의 북쪽에 면해있는 신전 안에 있다. 이 통로는 피라미드의 최초 토대가 된 마스타바의 지하로 이어진다. 이 입구를 통해 내려가면 기나긴 굴을 지나 지하 28미터 깊이의 바닥까지 도달하게 된다. 여기에 관을 두는 화강암 석실이 있다. 파라오의 관은 무게가 엄청난데, 이 관을 지하 통로로 나르지는 않았다. 천장의 구멍을 통해 관을 내리고, 그 위를 무게 3톤의 화강암으로 덮었다.

묘실을 둘러싼 회랑은, 모험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자극할 만큼 충분히 복잡한 미로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미로는 그러나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지상의 피라미드가 아니라, 지하에 존재하고 있다. 아무리 고대의 건축 기술이 뛰어나다고 한들, 석회암을 쌓아올려 만드는 건축물 안에 그런 복잡한 미로와 함정들을 설치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직선적인 형태의 비좁은 회랑이나 아주 단순한 형태의 함정들은 때때로 지상의 건축물 안에 존재한다).

이 미로로 구성된 지하 세계 안에는 여러 개의 비밀의 방들이 있었는데, 이 중 몇 개의 방에서 역대 파라오들의 이름이 새겨진 돌 항아리가 수천 점 발견되기도 했다. 이 돌로 된 통들의 용도가 무엇이었는지, 왜 역대 파라오들의 이름이 새겨진(따라서 역대 왕들의 시대에 제작되었을 수도 있는) 수많은 통들이 이 계단식 피라미드의 지하에 묻혔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조세르 왕의 피라미드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수많은 학자들이 매달려 연구하였다. 그러나 연구를 통해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는 만큼 새로운 수수께끼도 생겨났다. 아마도 그 많은 수수께끼들에 대한 해답은 영원히 얻지 못 할 것이다. 조세르 왕의 계단식 피라미드는 인간의 석조 건축 역사에서 영원한 이정표를 세운 것처럼, 고고학 분야에서 연구의 대상으로 그리고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신화적 존재로서 영원한 생명력을 누릴 것이다.

2011/08/02 00:35 2011/08/02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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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동창 친구들이 대전으로 찾아와, 오랜만에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유성구에 위치한 군 휴양 시설인 계룡스파텔을 예약했는데, 방 사이즈만 보고 2인실짜리 방을 6인실로 착각해 예약하는 실수를 저지르긴 했으나, 워낙에 방이 커서 자는 데에 무리는 없었다. 비록 카펫 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야 했지만 말이다. 계룡스파텔의 온천수는 정말 원천 그대로인지 15분 정도만 몸을 담그고 있었는데도 취한 듯이 노골노골해져버렸다. 저녁으로 먹은 석(石) 돼지갈비는, 꽤 훌륭한 선택. 반면 네네치킨의 매운 양념치킨은 먹으면서 화가 났다!

내년에는 해운대 그린나래를 수배하도록 노력 해보겠다. 해운대 바다에서 수영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조금 떨어진 작고 깨끗하고 조용한 해수욕장에서 놀고, 수산시장에서 회 먹으면 그것도 괜찮은 여름휴가가 되겠지.

2011/08/01 00:35 2011/08/01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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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에서 첫 바이올린 레슨을 받았다. 이 선생님은, 아빠가 대전 살 적에 다녔던 색소폰 학원 선생님이 소개 해 줬다나. 레슨 장소는 그 색소폰 학원이고, 레슨 선생님은 학원을 물려받은 사람의 동기생. 레슨비는 타임당 5만원. 연습실 대여비는 월요일 제외하고 전일 이용 가능한 조건으로 저쪽에서 한 달에 10만원 불렀는데, 8만원에 협상 중이다. 레슨에 돈을 들이붓는구나.

학원은 유성구청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는데, 네이버 지도에서 찍어보면 원룸에서부터 거리상으로는 10km도 떨어져있지 않으나, 신호도 많고 저녁때는 교통량도 많아, 편도 20분 정도 소요되는 것 같다.

일단 튜닝으로 청음 검정. 그 다음에는 C major, A major 스케일로 음감과 자세 검정. 마지막으로 모차르트 4번으로 음악성과 테크닉... 아 이건 논할 단계가 아니군. 거의 두 달 만에 연주한 모차르트는 개판도 그런 개판이 없었다. 손가락도 안 돌아가고.

하지만 오랜만에 바이올린을 켜니 마냥 즐거웠다. 레슨 끝나고 학원에 혼자 남아서 10시까지 연습을 했다. 앞으로는 퇴근하고 할 일이 생겼다.

돈을 아끼지 말자. 인생 전체를 보면,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시간은 돈을 벌 수 있는 시간보다 훨씬 짧다.

2011/07/30 02:31 2011/07/30 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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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하면 방에만 처박혀 있는 이 갑갑한 생활을 어서 청산해야지. 바이올린 레슨 선생님은 곧 구해질 것 같다. 금요일 저녁 때 만나기로 약속을 잡아 놨다. 하지만 바이올린 켜는 법은 이미 잊어버렸어. 손끝은 아주 말랑말랑해졌다. 레슨 장소는 해결이 됐지만, 연습실이 제공될지는 알 수 없다. 만약 연습실이 제공되지 않을 경우, 월세라도 내고 연습실을 대여할 의향이 있지만, 장소만 빌리기에는 돈이 너무 아깝다. 자유롭게 연습할 수 있는 피아노 학원이라도 등록해야 할 것 같다.

서울은 물난리가 난 모양이더군. 이쪽은 하루 종일 비가 오락가락 했다. 퍼부을 때는 무서울 정도로 퍼부었지만, 금방 언제 그랬냐는 듯 멎고, 그러다가 또 퍼붓고……. 이 와중에 체련일이라고 사무실 사람들은 풋살을. 나는 멀찌감치 떨어져 구경만 했다.

여름휴가 계획 : 8/5~8/8. 보통 놀면 최소 반년은 놀았던 나로서는 나흘을 ‘휴가’라고 불러야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2011/07/27 23:12 2011/07/27 2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