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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대전, 내 방이다. 공군대학을 방문하는 일정 때문에 대전에서 1박을 하는데, 대학 안의 숙소를 예약 해 주었지만 편하게 자려고 택시를 타고 방으로 와버렸다. 내일은 현충원을 들렀다가 오산과 서산을 방문하고 서울로 올라간다. 모레는 성남에서 헬기를 타고 이동하기 때문에, 내일 밤은 성남에 있는 내 집에서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집에서 성남 비행장까지야 금방이니까.

이번에 한국을 방문한 일본 방문단은 항공 자위대 간부학교에서 지휘막료과정을 이수 중인 영관급 장교들이다. 나는 명목상 이들의 인솔자인 간부학교 교장(중장)의 전담 통역이지만, 아무튼 50여 명의 인원과 함께 이동하는 것이어서 정신이 없다.

내 첫 통역이, 작년에 지휘막료과정 학생들이 수원 비행단을 방문했을 때 기지 안내 통역을 한 것이었다. 1년의 시간이 흘렀다는 얘기다.

김해 기지에서의 환담은 무려 1시간 넘게 이어졌다. 50여명의 여권을 모두 수거하여 김해 공항으로 가져가 입국 절차를 밟는 동안 환담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의례적인 인사말이라도 오갔지만, 나중에는 이야깃거리가 떨어져서 일본 관광 가서 핸드폰으로 찍어온 사진까지 나오고 난리도 아니었다.

대전 가는 길에, 점심 식사 장소인 추풍령 휴게소까지 휴식 없이 달릴 예정이었는데 고속도로를 탈 때까지 길이 많이 막혀서 시간이 지체되자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 하는 수 없이 칠곡 휴게소에 잠깐 멈추게 되었다. 한참 배고플 시간이었는데, 화장실만 이용하고 바로 출발하겠다고 하자 정말 놀랍게도 50여 명 중 단 한 사람도 편의점에서 우유나 커피 하나 사는 일 없이 딱 화장실만 이용하고 버스에 다시 탑승했다. 겉보기엔 한국군보다 훨씬 군기 없어 보이는데, 이건 일본인들의 천성인가?

추풍령 휴게소에서 먹은 음식은 갈비탕. 이곳 갈비탕이 맛있는 편이냐고 물어보는데 할 말이 없었다.

공군 대학 방문. 브리핑은 무난히 지나갔다.

이어진 만찬. 계룡 스파텔에서 뷔페식으로 준비했다. 공대 총장님은 부담 없이 마음껏 먹으라고 했지만, 난 접시 하나에 받아온 음식도 다 먹지 못 했다.

가장 어려운 통역은 사회자의 썰렁한 농담. 차라리 나도 “그냥 한 번 웃으십시오.”라고 통역하고 싶다. 대충 내가 웃으면서 통역하면 사람들도 웃어준다.

일본어 실력을 조금만 더 가다듬으면 대통령 통역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다. 일자리만 있다면 통역만으로도 먹고살 수 있을 텐데.

2011/09/20 23:43 2011/09/20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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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김해. 내일부터 시작될 통역 지원을 위해 하루 먼저 이곳에 도착했다. 대전 방에서 4시 반에 출발했는데 이곳 외래자 숙소에 들어온 시각은 9시 반. 중간에 저녁을 챙겨먹긴 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오래 걸렸다. 결정적으로 부대 정문에서 숙소까지 걸어들어가야 할 줄은 몰랐지. 게다가 숙소 배정에 착오가 생겨서 30분 가까이를 휴게실에서 기다려야 했다. 정말 내가 이런 대우 받으면서 통역을 지원 해 줘야 하는 건지 회의가 든다. 차가 수리 중이어서 어제는 고속버스를 타고 내려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고속버스가 고장났다! 버스는 안성휴게소에서 퍼져서 움직이지 못 했다. 기사는 차가 이상하다는 한 마디 말 외에 아무런 설명도 없이 여기저기 전화하고 우왕좌왕하며 난리였다.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도록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승객들은 어느 누구 하나 불만을 제기하거나 심지어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결국 30분이 경과한 시점에서 더 이승 지체했다가는 내일 출근이 위험하다는 위기의식을 느낀 내가 기사에게 상황 설명을 요구하자 그제서야 몇몇 승객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분통을 터뜨리며 성토를 쏟아냈다. 결국 성남에서 긴급히 출발한 예비 버스가 도착한 건 버스가 안성 휴게소에서 퍼진지 정확히 1시간이 경과한 후였다. 우여곡절 끝에 대전의 원룸에 도착한 시각은 밤 12시. 아침에는 이상하게 머리가 아프고 속이 좀 메스꺼워서 끼니도 거르고 출근버스를 탔다. 부대에 도착해서 본격적으로 토사곽란이 시작됐다. 아마 급체릉 했거나 어제 먹은 음식이 뭐가 안 좋았던 모양인데 빈 속에 위액만 나올 정도로 토하며 정신을 못 차렸다. 결국 아침 내내 업무는 하나도 못 보고 자료실 구석에서 의자에 앉아 쉬었다. 점심 시간이 선배 차를 얻어타고 계룡 시내로 나와 버스를 탔다. 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수리 맡겨놓은 차를 찾았다. 시험 운전을 해봤는데 엔진 상태가 정말 좋아졌다. 6개월 전에 완전 수리했을 때도 이렇진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거기선 날림 수리를 한 것 같다. 아무튼 전에 비해 소음도 줄고 차 떨임도 잦아들었다. 뭐 내가 또 속아주는 거란 느낌도 있지만... 내일부터는 통역. 3박 4일 동안 김해 대전 서울 서산 성남 광주 진주를 방문하는 말도 안 되는 일정이다. 지금 몸 상태론 도저히 따라다니기 힘들 것 같은데 내일은 좀 나아지기를 기대해 본다.
2011/09/19 22:46 2011/09/19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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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정전 사태. 이런 건 그냥 뉴스로나 접하는 소식인 줄 알았는데, 오늘 저녁 6시 15분 쯤, 대전시 관저동 일대에 전기 공급이 끊겼다.

차는 수리 맡겨놓은 상태라 퇴근 버스를 타야했지만, 간발의 차로 놓치고 말았다. 20분에 출발이라더니 시간 준수 칼 같다. 역시 군인 퇴근 버스. 다행히 대전시에 거주하는 후임이 차를 태워줘서 편하게 관저동까지 올 수 있었다. 방으로 돌아가기 전에 저녁을 해결할까 싶어서 식당을 둘러보는데, 평소 자주 가는 돈가스 전문점 ‘미소야’의 불이 꺼져있었다. 오늘 영업을 안 하나 싶어서 안을 들여다보니, 사람들이 등 하나 켜져 있지 않은 어두컴컴한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지 않은가. 처음에는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는데, 둘러보니 동네 전체가 정전. 사람들은 저마다 무슨 일이냐며 건물 밖으로 나와 웅성웅성. 미용실에서 머리하다가 놀라서 뛰쳐나온 아줌마도 있었다. 신호등도 꺼져버리고, 건물들에서 뿜어져 나오던 조명도 사라졌다. 이런 완벽한 적막감은, 어떤 휴일에도 경험한 적이 없다.

원룸 빌딩의 출입구에는 전자식 덧문이 설치되어 있는데, 당연히 정전으로 인해 키패드가 먹통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전기 공급이 차단된 문은 수동으로 열 수 있었다.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불도 켤 수가 없어 그대로 침대에 누웠는데, 어느 새 스르르 잠들어버렸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전기가 다시 들어왔다. 방에 전등은 꺼놓은 상태였지만 방 안의 모든 전기 제품에 일제히 대기 전력이 공급되는 그 순간의 오묘한 느낌은 선잠 든 상태에서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결국 운동은 가지 못 했다. 바이올린 연습도 못 했다. 다음 주부터 두 건의 통역 일정이 잡혀있어서, 이달 말까지는 운동이고 연습이고 여의치가 않을 것 같다. 운동 회비랑 연습실 대여료로 각각 8만원씩이나 지불하고 이게 뭐하는 짓인지. 얼마나 번다고 벌써 돈지랄이냐.

2011/09/16 00:51 2011/09/16 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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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는, 원인 미상의 알레르기 때문에 힘들게 보냈다. 25년 평생 알레르기 따위는 모르고 지냈는데, 요 근래 분당 집에만 가면 자꾸 목과 코가 가렵고 재채기가 나는 게, 처음에는 그냥 감기인가보다 하고 지나쳤지만 이제 분명해졌다. 이게 바로 사람들이 말하는 ‘알레르기’인 모양이다. 이번 추석 연휴 기간에는 증상이 피크에 달해, 정신이 멍해지고 두통까지 일 정도였다.

연휴 마지막 날, 시원하게 뚫린 하행 고속도로를 신나게 질주하고 있었다. 동공주 IC를 지나 당진상주고속도로로 진입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차가 갑자기 굉음을 내면서 퍼졌다. 설 명절 보너스를 받고 좋아하다가 중부고속도로에서 엔진 오일 부족으로 엔진이 터지면서 그야말로 목숨을 잃을 뻔 했던 올 초의 그 악몽 같은 날이 완벽하게 재현되는 순간이었다. 엔진을 교체했지만, 그 이후로도 엔진 오일 소모가 심해서 수시로 보충하고 다녔는데, 얼마 전 엔진 오일을 교체한 이후로 웬일로 오래 잘 달려준다 싶었으나, 램프에 경고등 띄우는 예고도 없이 엔진이 터져버리는 건 대체 무슨 경우란 말인가.

추석 보너스로 새 디지털 카메라를 구입하려는 단꿈에 부풀어있던 나의 뒤통수를 제대로 후려치는 한 방이었다. 밤 11시 반에 고속도로 갓길에서 견인차를 기다리는 그 심정이란. 지나가던 고속도로 순찰차가 나를 발견하고, 안전을 위해 20m 정도 뒤에서 경광등을 켜고 대기해줬다. 쪽팔리긴 했어도 진심으로 고마웠다.

스마트폰으로 네이버 지도를 켜고 찍어보니, 서대전까지 남은 거리는 약 30km 정도. 무상 견인 거리인 10km를 제하고, km당 2천원 추가 요금 물면, 방까지 5만원 안에 가겠다 싶어서, 관저동 원룸 가장 가까운 카센터로 가달라고 했다. 다행히 방으로부터 걸어서 5분 거리에 애니카 카센터가 있어서, 그곳에 차를 내려놓고 나는 방으로 돌아갔다. 샤워를 하고 마음을 좀 진정시켜보려고 했지만, 잠은 이미 다 잔 셈.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아침에 출근 버스를 타고 출근했다.

오전에 카센터와 연락이 닿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엔진은 완전히 망가진 것 같다고. 오후에는 등산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반가를 쓰고 나와 부랴부랴 카센터로 가서 대충 사정을 들었다. 확실히 문제는 오일이 어딘가에서 새면서 급격하게 빠져버리고, 엔진은 말라붙은 상태에서 무리한 운전으로 속이 완전히 망가져버렸다는 것이다. 오일이 새는 원인이야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어차피 엔진을 다른 것으로 갈든가 완전히 새로 조립해야 하는 지금 상태에서 그걸 밝혀내는 건 무의미한 일. 중고 엔진을 사다 얹을까 했지만, 복불복이라는 말에 일단 보링을 하기로 했다. 이렇게 또 추석 보너스는 허공으로 사라졌다.

이 차에 이렇게 많은 수리비가 들어갈 줄 알았더라면 진작 중고차 한 대를 샀겠지만, 장차 내가 한국에서 지낼 날도 앞으로 길어야 3년. 차가 절실하게 필요한 것도 제대할 때까지이니 2년만 버티면 된다. 이 마티즈는, 언젠가 반드시 내 손으로 폐차해버리겠다. 하지만 그 전까지는, 이제는 정말 ‘미운 정’이 들어버린 이 차를 타고 다녀야겠다. 언제 죽을지 모르겠지만.

방에 돌아와 잠을 좀 자고, 레슨을 받으러 출발했다. 차가 없으니 버스를 타야 했는데, 버스 카드로 쓸 수 있는 국방복지카드가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신용카드로 만들길 정말 잘 했어.

평소 직접 운전 해 가면 20분이면 가는 거린데, 버스를 이용하니 걷는 시간, 기다리는 시간, 갈아타는 시간 등 포함해서 거의 1시간이 걸린다. 땀범벅이 되어서 겨우 연습실에 도착해서는 그 두터운 철문 앞에서 망연자실 할 수밖에 없었다. 연습실 열쇠는 차 키홀더에 같이 끼워놨고, 그 키홀더는 지금 공업사로 간 내 차에 꽂혀있을 것이다. 레슨 시작까지 20분밖에 안 남았는데! 저녁도 못 먹고 허겁지겁 달려왔는데!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선생님 왈, 레슨 할 장소가 있을 것 같단다. 선생님을 기다리면서 일단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으로 저녁을 때웠다.

선생님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다름 아닌 선생님 모교인 충남대학교의 음대 연습실. 세상에 내게 음대 연습실을 써 볼 날이 오다니! 나는 대학 시절에도 종종 음악 감상을 하러 음대 도서관을 이용한 일이 있다. 그래서 음대 연습실이 얼마나 비좁고 갑갑한 공간인지는 오며 가며 곁눈질로 봐서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실제 연습실은, 정말이지 ‘음대의 로망’ 운운하기에는 너무 삭막하고 척박한 공간이었다. 중간 중간 모기도 잡으면서, 레슨을 받았다.

모차르트 4번 대신 선생님이 가져 온 곡은,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5번. 그 유명한 ‘스프링 소나타’다. 결국 이 곡을 피할 수가 없구나. 이 곡은, 클래식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들으면 알만큼 너무 유명한 곡이다. 게다가 분위기는 나와는 어울리지 않게 너무 밝고 경쾌하고 아름답다. 나에겐 뭔가 우울하고 음습한 곡이 어울리는 것 같은데 말이다. 아무튼 당분간은 이 곡을 연습하게 될 것 같다.

어제부터 계속 우울했는데, 레슨을 받고 오니 기분이 좀 상쾌해졌다. 연습실 키가 없어서 당분간 연습실을 이용할 수 없으니, 내일은 운동이나 가야겠다. 추석 기간에 몸 안 구석구석 쌓아놓은 칼로리를 좀 소모하면, 기분이 더 상쾌해질 것이다.

2011/09/15 01:06 2011/09/15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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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공구와 나무 조각들이 어지러이 널려있는 비좁은 골방에, 웬 곰 같은 사내가 앉아있었다. 자기를 어떻게 알고 찾아왔냐는 물음에 레슨 선생님이 소개 해 줬다는데도 반기기보다는 겸연쩍어하는 눈치다. 케이스에서 악기를 꺼내 이리저리 살펴본다. 브릿지도 만지고, 자도 대본다. 두드려도 본다. 나의 무심함에 치명적인 상처라도 입었을까, 마치 건강검진 결과 기다리는 조마조마한 심정이다. 괜찮다는 한 마디에 긴장이 풀린다. 활 털도 갈고, 현도 갈 테니 내일 찾으러 오란다. 떠나려니 붙잡고 커피 한 잔 하고 가란다. 서로 말 수 적은 사내 둘이 마주 서서 멀뚱멀뚱 쓰디 쓴 블랙커피를 들이켰다.

둔산3동 둔산남로에는 악기점이 많았다. 대전에도 이런 곳이 있구나 싶었다. 제법 능숙한 쇼팽의 ‘왈츠’도 들리고, 영 어설픈 바이올린 연주도 흐르는 주택가 골목을 지나면,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어 삼겹살 굽는 냄새가 진동하는 먹자골목이 나온다. 혹시 혼자 들어가 저녁 먹을 만한 가게가 있을까 해서 두리번 거려봤지만, 영 실패다. 후드득 떨어진 빗방울이 머리를 때린다. 하는 수 없이 다시 차를 몰고 골목을 빠져나왔다. 30분이면 오갈 거린데, 저녁 교통 체증에 걸리니 왔다갔다 찻길에서만 1시간 반을 허비했다.

방 근처에 카페가 하나 있다. 5,500원이면 식사에 후식으로 커피까지 준단다. 들어가 보니 카운터는 웬 꼬마가 지키고 있고, 주인인 듯 보이는 아줌마는 푹신한 소파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널찍한 가게 안에, 사람은 그 둘 뿐이다. 8시도 넘었는데, 다행히 식사는 된단다. 메뉴를 펴보니 돈가스에 해물 스파게티. 그래 여기가 흔히 말하는 ‘경양식’ 집인가 보다 하는데, 이어지는 메뉴는 해물볶음밥에 산채비빔밥. 돈가스 하나 시켜놓고 멍하니 기다리자니, 주인아줌마가 아들 나무라는 소리가 들린다. “너 또 음악 껐지!” “안 껐어. 그냥 소리만 줄였어.” 똘똘한 아이다. 그래도 손님이 왔다고 음악을 들려주려나보다. 곧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안 들어본 것 같기도 한 발라드풍의 대중가요가 흘러나온다.

커피는 커다란 머그잔에, 시럽은 남대문 시장 그릇 도매상가에서 내가 몇 번이나 들었다 놨다 했던 앙증맞은 컵에 담겨 나왔다. 원래는 시럽을 잘 안 넣어 마시지만, 오늘은 조금 넣어봤다. 씁쓸한 커피 맛은 여전하지만, 뒤에 살짝 단 맛이 남았다.

음식 맛도 그저 그렇고, 커피 향도 그저 그렇다. 하지만 싸고, 무엇보다 손님이 없어 좋다. 내 방에서 나와 모퉁이 하나만 돌면 전문 커피숍이 있다. 거기는 커피 한 잔 값이 이 집 식사 값이고, 늘 사람들로 북적인다. 손님이야 있든 말든, 책 읽는 엄마를 위해 음악 소리 낮추는 아들내미가 카운터를 지키는 이 텅 빈 카페에 더 정이 간다.

악기가 없으니 연습도 못 하고, 그렇다고 달리 할 일도 없으니 되도록 천천히 커피를 마시고 나와서도 시간이 남아, 오늘은 좀 일찍 일기를 썼다. 이제 운동이나 다녀와야지.

2011/09/08 21:24 2011/09/08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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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FG 보상 휴일. 이렇다 할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니라서 빈둥거리며 보냈다. 잠도 푹 자고. 오전에는 롯데마트에 가서 장을 봤다. 그래봤자 우유라든가 치약이라든가 몇 가지 샀을 뿐이지만. 곧 추석이라, 점원들이 한복을 차려입고 추석 선물 세트 판촉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햄 세트라든가 샴푸 세트 같은 것들을 사보라고 권하는데, 이런 게 추석 선물로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 가령 내가 누군가로부터 샴푸 세트를 선물 받는다면, 대체 어떤 표정을 지어야 좋을까.

롯데마트 다음에 들른 곳은 관저동 가구단지. 여기서 책장 하나를 주문했다. 방에 책장이라고는 달랑 하나 있는데, 책과 술 기타 잡동사니들로 가득 차서 방바닥에 책들이 나뒹굴고 있는데, 이 꼴을 더 이상 용인할 수가 없었다. 폭 1m 20에 3 X 3 칸짜리다. 술병들을 옮겨놓고 보니, 제법 훌륭한 술 진열장이다.

한 달 만에 바이올린 레슨을 받았다. 악기 상태가 좀 이상한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악기를 사고서 한 번도 점검을 받은 적이 없구나. 이런 무심함이라니. 악기를 제작한 공방에 들고가는 게 제일 좋겠지만, 일단 선생님에게서 대전 시내에 있는 악기사 한 곳을 추천 받았다. 활 털도 교체할 겸 내일 들고 가봐야지.

레슨 내내 나의 모차르트 연주를 불만스럽게 여기던 선생님은 결국 모차르트 포기 선언을 하셨다. 아주 완곡하게 돌려서 말했지만, 해석하면 “모차르트 할 실력이 안 된다.”겠지. 대신 다른 곡을 해보자는데, 하고 싶은 거 아무거나 말해보라고 도발을 해서 “브람스 소나타 1번이요.”했더니, 그건 또 안 되겠다고……. 아니 나도 될 거라고 생각해서 한 말은 아니었다고. 그러면서 브루흐는 어떠냐는데, 아니 무슨 브루흐. 아무리 생각해도 브루흐가 모차르트나 브람스보다도 훨씬 어려울 것 같은데. 선생님 말로는 낭만파 곡을 만지면서 소리 내는 법, 표현하는 법을 좀 익혀야 할 것 같다나. 아무튼 무슨 곡을 하게 될 지는 여전히 미정이지만, 조만간 낭만파 협주곡 하나 들어가긴 할 것 같다. 모차르트는 한 2년 쯤 후에 다시 도전해야지.

선생님이 노은동 쪽에 연습실을 마련한다고 한다. 그러면 지금 월 8만원이나 내고 대여하고 있는 클라리넷 학원 대신 저렴한 가격에 자기 학원 연습실을 대여 해 주겠단다. 나로서는 잘 된 일이지. 다음 레슨은 일단 다음 주 수요일로 잡아 놨다. 그 다음 주부터는 연이어 통역 출장을 나가게 될 것 같아, 또 다음 레슨을 기약할 수가 없을 것 같다.

복싱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권투’말이다. 원래부터도 심각한 운동 부족이었지만, 본부로 옮긴 이후로는 정말 서 있는 시간도 없이, 늘 앉아서만 생활하다보니 살은 찌고 몸은 둔해지기만 한다. 복싱을 잠깐 배운 친구가 줄넘기를 추천 해 줬지만, 몇 번 하다가 포기했다. 나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악기 연습 하고, 책 읽고, 글 쓰고, 칵테일도 만들어 마시는 자율적인 인간이지만, 도저히 운동만은 자율적으로 못 하겠다. 결국 난 나를 강제로 운동하게끔 해 줄 곳에 몸을 투신해버렸다. 원래는 테니스를 배우고 싶었지만(고등학교 때 잠깐 배운 적이 있다), 집중적으로 운동하며 살도 빼고 민첩성을 기르기에는 복싱이 더 나을 것 같아서, 바이올린 연습실과 가까운 곳에 있는 체육관을 찾아가 등록했다. 첫 날은 줄넘기와 뒷짐 지고 제자리 뛰기. 둘째 날은 3:1 뛰기(3번 제자리 뛰기 후 1번 앞으로 점프 했다가 다시 뒤에서 3번 뛰기 반복), 오늘 겨우 주먹을 쥐었다.

일단 시작은 했는데, 얼마나 할지는 모르겠다. 아주 지루한 게 딱 내 스타일이긴 하지만(지루한 걸 견디는 것은 천성인 모양이다), 원래부터 하고 싶었던 운동은 아니니, 일단 올해까진 열심히 해서 살 빼고 민첩성을 기른 다음, 내년에는 정말 테니스를 시작해볼까 싶다. 하지만 모르지. 이러다 또 복싱의 매력을 알아서 빠지게 되면, 바이올린처럼 평생 쭉 하게 될지도.

본의는 아니지만, 아무튼 매우 바쁜 생활을 하게 됐다. 6시 40분에 기상, 7시 5분에는 보통 출발한다. 공식적으로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근무. 적당히 5시 5분이나 10분쯤 일어나서 퇴근한다. 방으로 돌아오면 보통 5시 40분쯤. 저녁 먹고 쉬다가 7시에는 바이올린 연습을 하러 나가야 한다. 7시 반부터 9시 반까지 딱 두 시간 바이올린 연습을 하고 나면,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체육관으로 간다. 여기서 대략 1시간 내지 1시간 반 정도 운동하면 11시다. 방으로 돌아오면 11시 반. 개운하게 샤워하고 컴퓨터 앞에 앉으면 12시다. 운동을 떠나서, 이런 생활을 지속하면 살이 안 빠질 수 없을 것 같다. 체력이 버텨주려나.

일찍 자야겠다.

2011/09/08 00:55 2011/09/08 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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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연습실에 나가 바이올린 연습을 하고 왔다. 이 연습실이 과연 제대로 관리되고 있는 건지 의심스러운데, 거실의 에어컨이 고장 나 있었다. 다행이 방마다 설치된 벽걸이형 에어컨은 제대로 작동을 해서 찜통은 면할 수 있었다.

지난 3주간 레슨을 받지 못 했다. 물론 연습도 제대로 못 했다. 올해 들어서는 바이올린 실력이 조금도 발전하지 못 하는 것 같다.

훈련도 끝났겠다, 내일부터 레슨을 재개하려고 했지만 사무실에서 훈련 종료 기념 회식을 한단다. 전원 강제 참석이라 어쩔 수 없이 레슨을 또 다음 주로 미뤄야만 했다. 그래도 내일 회식 때는 레슨 핑계를 대고 가능한 일찍 빠져나올 생각이다. 소주는 마시기 싫다.

지난 주 토요일 남대문 시장에서 주문한 20만원어치의 술이 도착했다. 자세한 얘기를 쓰고 싶지만, 지금 샤워할 기력도 없을 만큼 피곤하다. 나중을 기약해야겠다.

2011/08/30 22:35 2011/08/30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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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FG 야간조 투입. 야간 근무는 정말 인간이 할 짓이 아니다.

무상급식 관련 투표일이 내일이던가? 나는 서울시 주민이 아니니까, 투표권이 없다. 그래도 한 마디.

무상 급식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은, 이것을 이른바 ‘부자 아이들’에게까지 무상 급식을 제공하느냐, 아니면 빈부의 차이 없이 모든 아이들에게 무상 급식을 제공하느냐의 문제로 보는 것. 그런데 이건 말 그래도 ‘하나의 해석’일 뿐이다. 나는 오히려 이것을 현 ‘의무 교육’ 체제 하에서, 급식이라고 하는 하나의 서비스를 교육에 포함시킬 것인가의 문제로 봐야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경제적인 문제일 뿐만 아니라, 이것은 교육에 대한 철학의 문제로도 확장된다. 국가가 제공하고자 하는 교육이 대체 어떤 교육인가에 따라, 그 철학을 관철하기 위해서 때로는 과감한 투자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책 입안자 쪽에서조차 이 논의를 좀스러운 수준에 한정시켜버렸다.

주민투표 실시와 관련해서는, 이런 문제를 투표로까지 끌고 나와 버린 시점에서 대의 민주정치에 반한다고 생각되지만(대체 시의회와 시장은 뭣 때문에 뽑았단 말인가?), 간혹 시민들의 직접적인 참정의 기회가 이런 식으로 제공되는 것도 순기능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이왕 투표가 실시되었으면, 그 권리의 행사는 전적으로 시민의 몫이므로 투표를 하라 마라 왈가왈부 할 대상이 아니다.

멍청한 민주당은, 한나라당이 밥상까지 차려줬는데도 불구하고(투표를 하고, ‘찬성’으로 결론이 나오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멍청하게도 잘못된 전략을 세워서 대응했다. 결국 투표 결과와는 상관없이, 투표율이 33.3%만 넘으면, 이 게임은 한나라당의 승리로 결판나게 되어버렸다.

2011/08/23 20:24 2011/08/23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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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 삼일 차. 업무에 익숙해져서 더 이상 치이는 일은 없다. 긴장 상태가 지나가자 한없는 무료함이 엄습한다. 그저 지루할 뿐.

공군에 몇 없는 일본어 어학 장교이다 보니 간혹 일본어 번역 의뢰가 들어온다. 외국 장성에게 보내는 축하, 위로 서신이나 단순히 안부를 전하는 사적인 서신, 각종 발표 자료나 스크립트의 번역 따위가 주를 이룬다. 내가 일어 통역이니 번역 의뢰야 얼마든지 받아 줄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원문은 제대로 써서 줘야 되지 않나? 한국인이 한국어로 쓴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엉망진창인 글들이 대부분이다. 수많은 비문들, 맞춤법 오류들, 그리고 문맥상 도저히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문장들, 되는대로 갖다 붙인 미사여구들…….

그런데 이게 비단 ‘못 배운’ 군인들만의 문제일까. 글을 잘 쓴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잘 정리할 줄 안다는 것이다. 반대로 글을 두서없고 난삽하게 쓰는 것은, 그만큼 생각도 깊이가 없고 논리가 결여되어 주장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니, 이런 사람들이 바로 ‘멍청이’다. 소위 명문 대학의 간판을 달고, 좋은 학점에 높은 영어 시험 성적을 쌓고, 각종 자격증을 취득한 사람들 중에도 이런 ‘멍청이’는 너무나도 많다. 나는 기업인이 아니니까, 이런 멍청이도 회사 운영에는 도움이 되는지 어떤지 알 수 없다. 다만 내 기준에서는, 글 쓰는 능력은 곧 인간의 품격과 관련되어 있다.

부나 지위, 명예 같은 것들도 물론 만족스러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들이다. 하지만 세상을 이해하는 식견, 예술을 즐길 줄 아는 안목, 여론에 매몰되지 않는 합리적인 이성 역시 훌륭한 인생을 위해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들이다. 돈이 많으면 세상 어디라도 갈 수 있겠지만, 식견이 없으면 어느 곳을 가더라도 여행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 인간의 격을 한 차원 높여주는 고매한 정신은, 독서와 글쓰기의 반복을 통해 길러진다. 글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사람은 마치 향기 없는 꽃처럼 매력이 없다. 그의 정신이 너무나도 빈곤하기 때문이다.

2011/08/19 01:35 2011/08/19 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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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 이틀 차. 나는 여전히 치이고 있다. 내가 속한 상황실에서, 나의 업무 처리 능력과 성실함이 으뜸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사정을 모르는 다른 상황실에서는 나를 닦달하고, 나무라고, 심지어는 깔보며 무시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나는 우직하게 규정과 절차를 준수하며, 부여된 임무에 대해 하나하나 물어보면서 처리한다. 무슨 험한 말을 듣든, 나는 낮은 자세를 잃지 않는다.

내가 믿고 따를 수 있는 지침을 내려주는 윗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참 서글픈 일이다. 사람 보는 눈이 없고, 자기 자신을 돌아볼 능력은 더더욱 없는 인간들에게는, 차라리 동정심이 든다. 말만 번지르르한 인간들. 그들이 무책임하게 내뱉어놓은 허언들만이 쌓이고 쌓여서 이 참혹한 세상을 빚어버렸다. 모든 것을 임기응변으로 처리해야 될 바에야, 차라리 훈련 지침을 나에게 새로 만들게 해주면 좋을 텐데. 언제나 규정은 능률 위에 있고, 계급은 규정 위에 군림한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세상에서, 나는 차라리 ‘무능력하다’는 말을 칭찬으로 알고 들으련다.

다음 주, 대전시립교향악단의 연주회를 예약 해 놓았는데, 훈련 때문에 연주회를 보러갈 수 없게 생겼다. 내가 자리를 지키고 앉아 보내는 12시간이, 음악회에서 오케스트라의 튜닝을 지켜보는 시간만큼의 가치라도 있었더라면 이렇게 억울하지는 않을 것을.

나는 꽤 쓸 만한 사람인데, 나를 쓸 만한 사람은 도통 없다.

2011/08/18 00:16 2011/08/18 00:16